오는 12월 10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뜻 깊은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의 이름은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콘서트’다.
 
콘서트와 함께 헌정음반도 발매하는 이 ‘대형행사’는 아직 언론에 소개된 바 없지만,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노동해방’의 줄임말을 이름으로 삼은 시인 박노해가 1984년,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을 발표했을 때 세상은 경악했다. 대학물도 먹지 못한 공장 노동자 출신의 이 무명시인이 때묻지 않은 노동자의 화법으로 노동의 참혹함과 신산스러움을 그려내면서, ‘노동’의 분노와 슬픔이 비로소 세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며 소주 한잔 마시는 것 외엔 달리 스스로를 위무할 길 없던 노동자들은 박노해의 시와 노래로 지친 하루를 달랬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라던 ‘노동의 새벽’의 한 구절은 그들의 한탄스러운 자기고백과도 같았다. 머릿 속에서만 ‘혁명’을 되뇌이던 ‘먹물’들에게 그의 시들은 충격과 경외로 다가왔다.
 
훗날 그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는 좌익정치조직의 핵심멤버가 되어 혁명을 선동하고 나섰을 때 세상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그에게 시란 삶과 투쟁의 ‘무기’였고, 사람들은 그가 쥐어준 무기를 손에 들고 혁명의 거리로 뛰쳐나갔다. 거리마다 그의 시와 노래가 울려퍼졌고, 그는 그의 시를 넘어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강산이 두번 바뀐 그 세월만큼 세상은 변했다. 감옥에서 나온 박노해는 ‘나눔과 평화’를 노래하는 운동가가 되었다. 노동운동도 변했다. 프레스에 손발이 잘려나가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던 노동자들 중 일부는 이제 ‘귀족’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가 <노동해방문학>이라는 잡지를 통해 ‘철의 혁명군’이라 일컬었던 현대중공업 노조는 민주노총에서 제명되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빠르게, 그리고 거대하게 변하고 있다.
 
이처럼 혼돈스러운 2004년의 끝에 ‘노동의 새벽’은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지금 ‘노동의 새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20주년 콘서트의 컨셉은 이렇다.
 
80년대 민주화와 노동운동 정신의 공동체적 구현. 
2000년대 세계를 향한 평화나눔 정신의 구현.
 
이 행사를 추진하는 이들은 “비엘리트적인 노동자 시인의 시집이 사회를 바꾸었음에 중점을 두고, 시인 개인이나 시가 아닌 <노동의 새벽> 시집에 헌정한다는 것”을 기본컨셉으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접근방법의 핵심코드는 시대와 사건에 대한 ‘회고’”라고 밝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뮤지션들의 면면이다. 농사꾼 출신 가수 장사익이 ‘노동의 새벽’을 부르고, 오필승코리아의 ‘국민가수’ 윤도현은 신곡 ‘이불을 꿰매면서’(김희갑 작곡)를 부른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도 출연한다.
 
인디록밴드 언니네이발관이 ‘가리봉 시장’을, 윤선애와 달파란이 ‘민들레처럼’을 부른다. 댄스가수 싸이가 ‘포장마차’를 부르는 것도 흥미롭다. 신해철이 이끄는 N.EX.T가 ‘겨울새를 본다’를, 이주노동자 밴드 STOPCRACKDOWN이 예의 ‘손무덤’을 부른다. 20주년 기념 헌정음반 제작의 총지휘는 신해철이 맡았다.  
 
뜻깊은 것은 이 행사의 수익금 전액이 이주노동자를 위해 쓰인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주노동자의 사망시 장례비용과 함께 유골을 고국으로 송환하는 사업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 맞벌이 이주노동자를 위해 자녀들의 공부방 시설에도 지원할 계획이다.
 
행사홍보도 적극적이다. 민주노동당, 각 대학 민주동문회 등은 물론,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도 ‘메인 배너광고’를 걸 예정이다. TV, 일간지, 지하철역, 카드 요금청구서, 직장인 사내 BBS 등 가능한 모든 곳에 전방위적 홍보를 펼친다는 계획이다.
 
각계 인사들로 꾸려진 ‘추진위원’들의 면면도 다채롭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변호사’로 변신한 사노맹의 수장 백태웅, 법륜스님, 국회의원 심상정·임종석,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아불 카엘, 전태일의 누이동생 전순옥 참여여성복지센터 대표, 영화배우 조재현 등 저마다 ‘유명세’를 자랑하는 인물들이 이번 행사를 뒷받침한다.
 
과연 이처럼 주도면밀하고, 프로페셔널한 이번 행사가 80년대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을 넘어 노동의 새벽 20주년의 ‘위상과 의미’를 되살리는 단초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행사를 바라보는 ‘어떤’ 이들의 마음은 더러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다. 왜일까. 꽃다지 전 대표 이은진씨는 “가장 노동의 새벽다운 노동의 새벽이 과연 무엇일까 고민된다”고 말한다.
 
“최근까지도 이런 행사가 있는지 몰랐어요. 조금 씁쓸하네요. 과거 ‘노동의 새벽’의 의미를 다시 끄집어내서 현재화시킨다는 컨셉은 좋아요. 하지만 과연 이런 행사에 일반 노동자들이 얼마나 참여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7만 7천원이나 하는 콘서트 요금도 너무 부담스럽지요. 수익금 전액을 이주노동자를 위해 쓴다고 했지만, 과연 지금 이주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게 장례식 비용이나, 유해 송환 비용 같은 시혜적인 것들일까요. 당장 생존을 위해 노동비자를 달라고 명동성당에서 오랜 기간 농성중인 이주노동자들에게 공부방이 문제일까요? 그렇게 보면, 결국 이주노동자 밴드를 공연에 참여시킨 것도 혹시 구색맞추기는 아닐까 의심이 들 수밖에요.” 
 
그는 이번 공연에 대해 어떤 ‘단절’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과거 노동문화운동을 이끌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이들 대부분은 불과 한달여 뒤에 이런 대형행사가 열린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노동가요 대부’ 김호철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는 박노해씨를 존경하고, 과거 그 분과 현장에서 함께 활동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자신의 변화가 전체 민중운동의 변화인양 착각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노동현장은 여전히 처절하기 짝이 없는데, 이처럼 ‘기념’하고, ‘회고’합니까. 결국 제가 보기엔 그 분 자신이 인텔리화돼가고 있다는 겁니다. 비정규직 문제로 다음달 노동운동진영이 강력한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20주년 콘서트를 자기들끼리 벌이는 의미가 대체 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노동의 새벽도 상품이 된다는 걸 보여주자는 건가요? 이런 행사가 열릴 때마다 정작 우리 같은 노동문화 활동가들은 힘이 빠지고 맙니다.”
 
이은진씨는 노동의 새벽이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한 ‘이벤트’가 되지않을까 우려했다.
   
“이를테면 열린음악회가 ‘자 우리 손을 잡자’를 가져갔던 것처럼, 혹시 이번 행사도 내용은 변질된 채 형식만 빌리는 일종의 상품이 되는 건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출연하는 가수들 중 과거 노동문화운동의 맥을 잇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게 유감입니다.”
 
노동운동진영의 한 관계자는 이번 행사에 대해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이런 쓴소리를 행사추진위측에선 어떻게 받아들일까. 추진위의 한 관계자는 “이 행사는 단지 ‘회고에 그치고 말자’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80년대에 대해 ‘회고’라는 접근방법을 쓴 것은 당시 ‘노동의 새벽’이 준 파장을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20년 전과 지금은 노동의 의미가 천지차이로 달라졌고, 지금 가장 근본적인 건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우리의 컨셉입니다. 당시 ‘슬픔의 힘’을 기억하자는 것이죠. 물론 출연진 캐스팅의 경우 실제로 내부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의 시각이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싸이가 포장마차를 부르는 것을 두고 부르조아가 왜 이런 노래를 부르냐고 하는데, 아니 부르조아는 이런 노래 부르면 안됩니까?”
 
“수익금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장례비용 등에 쓰이는 마는 것은 너무 안일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강제추방이나 노동비자 문제가 이주노동자들의 핵심적 현안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행사에서 그런 단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직접적인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자는 뜻이었지요. 오히려 당장의 유해상환이나, 공부방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2004년판 노동의 새벽’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시선엔 ‘기대와 우려’가 혼재돼 있다. 그것은 ‘노동의 새벽’이 지닌 의미를 올곧이 되살렸으면 하는 ‘기대’이고, 꼭 같은 무게의 ‘우려’이기도 하다.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음반과 콘서트’ 기획안 첫 장엔 다음과 같은 시인 고은의 글이 실려 있다.
 
“지금 우리는 80년대의 <노동의 새벽>을 역사적 대상이나 지난날의 기억으로 돌리는 일과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인간정신의 재생을 찾는 일 가운에서 후자의 사명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이 찾고 있는 ‘새로운 인간정신’이 과연 어떤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혹 어떤 이들에게 이 행사가 ‘단절과 소외’로 다가온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다. ‘전쟁같은 밤일’을 마친 우리네 노동자들에겐 더욱 그렇다. 노동의 새벽이 지닌 ‘첫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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