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노조 중앙위원회는 지난 2000년 9월 (노조의) 정책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영주 정책위원(전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영국 맨체스터대학의 PREST(과학기술정책연구대학원) 박사과정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고 위원은 ‘한국과 영국의 공공연구기관에 대한 과학기술정책 연구비교’라는 논문주제를 갖고 4년 기간의 박사과정 유학을 위해 영국으로 출국했다. 그런데 한국화학연구원은 같은 해 12월 고 위원이 무단결근 및 직장이탈을 했다는 이유로 파면했다.

이에 과기노조와 고 위원은 한국화학연구원의 이러한 파면처분이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해 현재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 중이다.

전임자 해외 박사과정 파견 노사 입장차

고 위원이 제기한 소송의 핵심 쟁점은 고 위원의 유학이 노조활동에 해당하는지 여부와 고 위원과 같은 산별노조 전임자에게도 출근의무가 인정되는지 여부이다.

1, 2심 법원은 첫 번째 쟁점에 관해 고 위원이 연구목적으로 삼은 논문의 주제가 노조활동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고, 유학기간이 4년이라는 점을 근거로 고 위원의 유학이 노조활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쟁점에 관해 1, 2심 법원은 산별노조 전임자인 고 위원에게도 당연히 출근의무가 인정되는데 고 위원이 한국화학연구원의 내부규정이 요구하는 절차를 밟지 않고 출국했기 때문에 무단결근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1, 2심 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고 위원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한국의 정부출연 과학기술연구기관의 정책변화과정을 영국의 사례와 비교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서 고 위원은 이 논문에서 정부출연 과학기술연구기관의 목표 및 전략, 지배구조, 예산구조, 연구방식 등의 변화과정과 이에 대한 노조의 대응 및 노사관계의 변화 등을 구체적으로 연구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내용의 논문은 향후 과학기술연구정책의 수립 및 변경과정에서 과기노조가 참여해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개진하는데 중요한 근거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능히 예상할 수 있고, 고 위원 또한 향후 과기노조의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자신의 논문이 주요 자료나 정책적 대안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이러한 논문주제를 정하고 영국 유학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고 위원은 4년 가까운 유학기간 동안 영국의 노조와 맨체스터대학 국제노동대학원 등 노동운동 연구단체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많은 정보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축적한 뒤 현재 과기노조의 정책위원으로 활동하며 과기노조의 정책역량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는 과기노조가 고 위원을 영국에 파견한 것이 '노조를 위한 의미있는 투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산별노조 전환기, 전임자 조합활동범위 선례

고 위원의 논문과 영국체류가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과기노조의 활동과 관련이 없다고 한 1, 2심의 판단은 극히 피상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유학기간이 4년이라는 점 역시 고 위원의 유학이 노조활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1, 2심의 판단에 대한 합당한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왜냐면 고 위원은 영국에서 논문을 작성하고 과기노조의 정책연구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전자우편 등의 수단을 통해 국내에 있는 과기노조 간부들과 국제정보의 공유와 의견교환 등 일상적인 노조 활동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별노조는 직종의 여하를 불문하고 동일한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근로자들을 조합원으로 하는 조합으로서, 산별노조의 전임자는 자신이 소속된 사업장 근로자의 범위를 뛰어넘어 그 산업에 종사하는 전체 근로자의 근로조건의 유지·개선과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산별노조의 전임자는 수시로 그 노조 산하의 수많은 사업장을 직접 방문하거나 상당기간 체류할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러한 산별노조의 전임자에 대해 자신이 소속한 사업장의 취업규칙이나 사규를 근거로 산별노조의 특정 지부나 분회 사무실로 근무장소를 한정하거나, 근무장소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산별노조의 활동 자체를 봉쇄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산별노조의 전임자에게는 출근의무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2001년 2월 금속노조가 출범한 이래 우리나라 노조는 현재 기업별 노조에서 산별노조로의 전환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고 위원 사건은 산별노조 전임자의 조합활동 범위에 관한 선례(리딩케이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법원의 신중하고도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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