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그래서 그토록 가난한 시절에도 가을은 넉넉함이 있었다. 그런데 올 가을은 풍요로움 보다는 시끄러움이 더한 듯하다.
 
정치판은 언제나 요란하지만 올해도 여야간에 샅바싸움이 한창이다. 4대 개혁입법을 둘러싼 공방이 첫판이다. 경제판도 아우성이다. 이웃나라, 경쟁상대국들은 경기가 좋아 성장률이 높아가는데 왜 우리나라는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느냐다.
 
성장과 분배, 소득의 양극화, 쌀시장 개방, 한일간 자유무역협정,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돈을 바꿀 것이냐 까지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노동계는 이라크파병 , 공무원 노조법,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하여 총파업을 준비한다 해서 바짝 긴장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문제들이다. 특히 경제문제는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근본 문제이다. 그렇다고 경제 살리기가 급하니 정치개혁은 제쳐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이거나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얘기다.
 
정치는 경제의 흐름과 관련한 제도를 만드는 역할을 하므로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든 일에는 경중이 있고 때가 있는 법이다. 굳이 따지자면 4대 개혁입법이 여기에 들어맞는 문제일 것이다.

퇴색된 개혁입법의 언저리

지금 국회에서 열기를 뿜고 있는 4대 개혁입법은 한마디로 중요한 국가발전전략의 하나와 관련되어 있다. 역사를 올바르게 정리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세우고 앞으로의 국가 백년대계를 가름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과거사진상규명법이 청산의 제도라 한다면 언론개혁법과 사립학교법은 미래를 향한 발돋움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고 과거사진상규명법이 왜 제정되어야 하는가는 일일이 따져볼 것도 없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세력의 면모에서 분명해진다.
 
그들의 대부분은 반공주의와 독재권력으로부터 혜택받은 자들이다.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이 노무현정부를 좌파정권으로 몰고 ‘체제수호’까지 들먹이면서 결사반대하는 것은 이 법들이 자신들의 설 땅을 그 근저로부터 허물어버릴까 두렵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이유없이 학살 당하고 투옥되고 고문당하는 것은 자신들이 국가라는 관점에서 정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기를 쓰고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언론개혁법안과 사립학교법은 기득권층의 권위주의적 기반을 포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발전을 요구한다. 당연히 국보법 페지와 과거사진상규명법 제정에 반대하는 사람과 세력은 반대다. 그 이유는 이른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의 해악과 재단의 비리와 횡포로 얼룩진 사립학교의 실상으로 미루어 보면 분명하다. 이들은 모두 한 줄기에 한묶음으로 엮어져 있다. 시장의 독점과 국민 의식의 마비를 통해서만 스스로의 존립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혁입법에 찬성하고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든가. 여당의 최근 논의 결과를 보면 보수정치의 한계를 다시한번 절감케 한다. 열린우리당이 결정한 개혁입법안은 누더기가 되거나 면피용으로 변질될 위험성을 짙게 풍기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알맹이 빠진 개혁안“이라 하여 공동발의를 않겠다고 반발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군더더기 없이 폐지하고 과거사진상규명법은 자료제출, 동행명령자 거부자 등을 처벌하는 방향으로 강화하며, 사립학교법은 교원임면권을 학교장에게 주도록 하고 언론개혁법은 소유지분 분산제도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열린우리당의 김재홍 의원이 단식투쟁을 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포커스’라는 아침 출근길 공짜신문은 이를 두고 이렇게 비꼬았다.

열린우리당의 산모의 뱃속에서 나온 것은 아기가 아니라 우렁찬 굉음과 함께 메탄가스가 폭발한 것 뿐이었고 그 악취에 졸도한 의사들을 보고 시민들은 "그 동안 열린우리당이 건강한 개혁입법을 순산하겠다며 뻥치더니 결국 방귀만 뀌다니 참 경우도 없고 냄새만 더럽다"고 입을 모았다고.

공격받는 이유는 ‘우군’ 잃었기 때문

최소한 오욕의 역사만이라도 청소하고 가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강한 의지마저 거스르는 이런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직 다른 당과의 협상이 남아있어 기다려 봐야겠지만 이대로라면 그야말로 면죄부를 받게 된 청산의 대상들이 되레 큰소리를 치는 형국이 될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된 이유는 당 안팎 모두에 있는 듯 하다.
 
이른바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져 오는 열린우리당 내부 보수파의 압력을 뿌리칠 수 없었다는 점과 한나라당을 비롯한 수구냉전세력의 노무현 정부에 대한 좌파 공격을 완화시켜보려는 데서 나타난 결과인 듯 하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좌경세력의 손아귀에 있다는 수구세력의 아우성은 그들의 위기의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강요된 극우편향에서 정상으로 돌아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노무현정부가 가까스로 탄생하고 4.15총선에서 개혁세력이 우위를 점한 것은 그 맥락에 있다. 따라서 여당은 당내 보수세력에 대해서는 그 맥락에서 설득해내야 하고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비위를 맞추어 공세를 둔화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맞장뜨기로 가야 할 일이었다. 어떻게 해도 노무현 정부는 한나라당과 수구세력이 보기에는 타도되어야 할 좌파일 뿐이다.

다음으로 개혁입법이 퇴색할 수밖에 없는 큰 이유는 조직된 우군을 모으지 못한데서도 발견된다. 조직된 우군이란 바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일 것이다. 사실 이들에 대해 현 집권세력이 지닌 매력은 그다지 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을 윽박지르고 밀쳐내는 일이 더 많다고 보는 이도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비정규직 관련법 추진이다.
 
노동부는 거의 필사적으로 비정규법안의 현실성과 합당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를 따르는 의견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노동계는 펄펄 뛰는데 반해 자본쪽은 반대라고 하기는 하지만 ‘표정관리’ 수준에 가깝다는 것이 중론이다. 왜 이런 법이 역사적인 개혁입법을 서둘러야 할 시점에서 튀어나와 우군을 쫓아버려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잘못 바로잡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노동계에 대해 사안을 분리해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개혁입법과 비정규직 법은 따로 대응해야 한다고. 이렇게 이성적인 판단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만 삶의 문제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데 그것은 상관하지 말고 개혁입법을 지지하라면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까? 이것을 집단 이기주의라고 매도한다면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라는 비난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정부 입법안이 비정규직의 증가를 막고 차별을 완화하는 완벽한 정답이라는 결론은 어디에도 없다.

뒤늦게 여론을 수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정부의 권위’나 ‘법의 권위’를 위해 입법안대로 관철시키겠다는 욕심이야말로 진짜 위험스러운 일이다. 스스로 얘기하는 유연성과 안정성이야말로 이럴 때 필요한 것 같다. 보다 유연한 자세로 의견을 수렴하여 법안을 보완하려는 방향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참여정부 두 돐이 된다.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이행해야 하는 역사적 요구에 뒤짐으로써 빚어지는 비판이 격렬한 저항투쟁으로 폭발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챙겨봐야 할 때인 듯 하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정말로 어려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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