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시대라서 그런지 나라의 사정을 견주어 보는 통계가 많이 쏟아져 나온다. 저마다 목적과 조사 분석방법을 달리하고 해석과 평가도 여러 갈래라 헷갈리기도 한다.

과거 정부나 관변단체들이 스스로의 업적을 과시하느라 과대포장하거나 또는 경제인단체나 그 편에 선 연구단체들이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그럴싸하게 만들어내는 일이 많아 노동자들은 일단 거부감을 갖거나 의심의 눈초리로 되짚어 보는 것이 오랜 습성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 자체를 제대로 밝히고 장래에 자신을 갖게 하거나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주는 자료라면 굳이 멀리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요즈음처럼 오랫동안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경제의 성장력이 어떻고 잠재력이 어떻고 하여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판국에는 용기를 주는 자료들이 필요하다.

경제대국 생활빈국의 자화상

며칠전 한국무역협회가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자료를 내놓았다. 세계적인 기구라는 곳에서 낸 통계를 모아 2002년 현재 우리나라의 위치와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기구란 세계은행(IBRD),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연합(UN), 세계무역기구(WTO) 등이다. 여기 실린 통계는 제각기 기준이 있어서 무작정 믿어버리기에는 무리지만 총체적으로 비교하는 지표로 삼을수는 있다.

아무튼 이 자료들에 의하면 세계 224개 나라 가운데 땅덩어리는 109번째 밖에 안되는 나라가 이렇게 큰 일을 해냈는가 대견하기 그지없다.

먼저 경제규모는 세계 상위권이다. 국내 총생산액은 2003년 기준으로 6,052억달러로 세계 11위, 교역규모는 3,726억달러로 14위, 수출액은 1,938억달러로 12위, 무역흑자는 150억달러로 19위다. 외환보유고는 올 5월 현재 1,665억달러로 4위, 2002년 세계시장점유율 1위인 품목은 77개로 13위이고 1등짜리 상품도 여러개지만 10등안에 든 상품수를 따지면 1,287개로 135국중 12위다. 연구개발투자도 138억달러로 7위이고 자동차 보유대수도 12위다.

미국, 독일, 일본 등 경제대국의 수준과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자원도 자본도 빈곤하기 그지없는 반도의 반쪽에서 이런 성과를 거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찌보면 양적으로는 우리나라 경제는 엄청나게 커졌다. 그것은 1971년 -2002년 사이 연평균 7.2%로 112개 나라 가운데 4번째로 빨리 성장한 결과다. 자원도 자본도 빈곤한 이 조그만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여러 가지 조건이 작용하였지만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에 그 핵심이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수 없을 것이다. 생계비에 턱도 없이 모자라는 저임금, 언제나 생산성 상승률을 밑도는 임금인상률, 부끄러운 산재왕국의 오명을 가져온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세계 최장의 장시간 노동이 가져온 성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주어진 삶의 질은 너무도 뒤처져 있다. 삶의 질은 52개국중 34위다. 국제노동기구가 소득안정, 노동시장 안정, 고용보호, 직능안정, 작업안전도, 업무안정 등 7개 항목을 평가해 조사한 경제안정지수는 90여개 나라 가운데 32위이다.

그토록 고임금이라고 야단을 쳤던 제조업 생산직 임금수준은 29개 나라에서 21위다. 2003년 물가상승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30개 나라 중 6위, 서울의 도시생활비는 144개 도시중 7위, 생활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는 지금의 국민 평균수명은 74세로 54위다.

대단하지만 보잘 것 없는

게다가 경제를 키우기 위한 조건도 취약한 구석이 많다. 투명성지수는 35위로 외국자본이 투자를 기피하는 큰 이유로 되고 있다. 해외의존도는 너무 높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분명해졌다.

무역의존도는 수출 32.0%, 수입 29.5%로 합하여 61.6%다. 일본의 19.9%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 특히 미국과 중국에 대한 수출액은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802억달러나 된다. 원유도입량은 188억달러로 세계 3위다.

산업과 생활규모가 커진데 따른 것이지만 대체 에너지 생산이 58국중 40위라는데서 나타난 것처럼 다른 에너지원 개발을 게을리하고 석유 다소비생산구조를 혁신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밖에 지식산업시대를 무색케 하는 지표도 있다.

교육기관 지출비중이 국내총생산의 2.75%로 3위에 올라 있고 미국유학생 수 역시 인도와 중국에 이어 3위에 올라 있으나 토플 평균점수는 153개국중 109위다. 토플이 실력 전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유학열풍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 그리고 미래의 성장과 경쟁력을 뒷받침해줄 동력원이 매우 취약함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국가 백년대계의 기초라는 교육 연구의 실상은 성장론자의 처지에서 보더라도 심각하다.

고등교육 이공계 졸업생 비율은 41%로 세계 1위에 올라 있다. 하지만 인구 1천명당 연구개발인력은 3.99명, 국민 1인당 연구개발투자는 290억달러에 지나지 않는 중위권이다. 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고등교육이 산업현장의 요구와는 동떨어져 있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원인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사실들은 성장 기반을 지탱해줄 인재양성과 양성된 인재활용도 사이에는 크나큰 간격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성장신화시대에서 벗어나야

규모의 크기에 비해 너무도 낮은 삶의 질은 이 밖에도 많은 지표로 나타나 있다. 최저한의 보호망에서도 비껴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절반을 넘어선지 오래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통계상으로 2002년에야 겨우 지난 53년 제정될 당시 근로기준법이 정한 '주 48시간'의 선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수준이며 산업재해율은 여전히 산재왕국이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보장은 제자리걸음에 환경오염의 심각도는 날로 높아가고 있다.

노동기본권 보장수준은 또 어떤가? 선진국을 눈앞에 두었다는 나라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이 감옥에 갇히고 노동자들이 목숨을 내던지는 상황에서 세계 상위권이라는 양적 지표가 자부심으로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칫 이들 양적 지표는 식민지시대 반민족 반인륜적 행위가 해방 60년이 다 돼가도 청산되지 않는 사회, 냉전시대 포악한 군사독재권력의 하수인들이 기득권을 고수하려고 큰 소리를 치는 사회, 그런 사회를 합리화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혹자는 성장을 해야 삶의 질 향상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규제를 풀어 자본 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고 노동을 더 유연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기업도시라는 자본의 해방구를 만들자는 기발한 발상까지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하지만 성장이 삶의 질 향상을 담보한다는 증좌는 위에서 든 통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성장신화에서 삶의 질 향상으로 국가 발전의 기본틀을 바꿔야 함을 무역협회의 통계집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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