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이라는 사실은 때로 무거운 짐을 진 자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서로가 타협하고 그 타협을 통해 화해하더라도 예술인이기에 그것을 넘어서는 절대 자유를 요구해야 하는 불가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제 우리는 그 법의 ‘폐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 한 장이, 시 한편이 국가안위를 위협한다고 믿는 저 야만의 심장을 거부해야 하기에 우리는 폐지만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예술인들이 국보법 폐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미술인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보법 폐지의 염원을 A4 용지 한 장에 담는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 ‘행동’은 ‘표현의 절대자유’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인들의 숙명이자, 사회적 책임의식의 표현이다.
 

 
화가, 조각가, 판화가, 설치미술가, 큐레이터, 미술평론가 등 각 분야 미술인들로 구성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범미술인연대(이하 미술인연대)’는 4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정동에 위치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시장에서 ‘A4 자유-국가보안법과 창작의 자유 展’을 연다.
 
“우린 예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삶을 삽니다. 한 사람은 개인으로, 예술가로서 삶을 사회 속에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사는 이곳에 잘못된 사회적 정치적 틀이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미술인 예술인이 어는 섬이나 행성, 별천지에서 뚝 떨어져 살지 않는 이상 미술인도 미술가 이전에 사회 구성원의 일원이니까요.”
 
‘A4 자유전’의 실무진행을 맡고 있는 안성금씨(설치미술가)는 미술인연대가 국보법 폐지에 나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는 미술인연대가 작가 개개인에게 동참을 호소하면서 작성한 글, ‘예술인들이 국보법 폐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안씨는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을 넘는 상황에서도 왜 국보법 폐지가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미술인이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시기획의 취지를 밝혔다.   
 

 
국보법이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미술인들이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중요한 이유다.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보법 7조(찬양고무)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자체를 옭아매는 족쇄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에 동참한 작가 중 대표적인 국보법 피해자인 신학철 화백은 “국보법은 일반인들에게도 행동적·정신적 제약이 되지만, 특히 예술가들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엄청나게 억압해 정상적인 작업을 힘들게 만든다”고 말한다. 신 화백은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보법이 존재하는 한 작가는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다”며 “이는 건강한 표현이 분출되는 것을 틀어막아 궁극적으로는 작가들뿐 아니라, 국가 입장에서도 큰 마이너스가 된다”고 지적했다.  
 
지난 99년, 그림 <모내기>로 국보법 위반 유죄 확정선고를 받은 신 화백은 유엔인권위원회에 그 부당함을 진정했고, 이를 수용한 인권위는 올 3월 유죄판결에 대한 보상, 유죄판결 무효화, 법정비용 보상, 그림의 원상복구 및 반환 등을 우리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법무부는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신 화백은 “국보법은 완전 철폐돼야 하는 악법으로, 국보법 철폐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뭐든지 할 것”이라며 이번 전시회 참여 동기를 밝혔다.
 
1989년 6월 미국 로스엔젤레스 ‘민족학교’를 통해 평양축전에 축하작품을 보낸 혐의로 구속된 적 있는 홍성담 화백 또한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홍 화백은 “국보법이라는 특별법이 있는 한 우리 작가들 스스로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기 검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상상력을 자기 검증하게 될 때, 우리 사회의 정신병적 증세에 예술가들 또한 빠져들고 만다”며 국보법이 폐지되지 않을 경우 발생하게 될 해악을 경고했다. 
 
홍 화백의 이어지는 말은 격앙 그 자체였다.
 
“어차피 국보법이 별로 힘을 못 쓰는데 왜 폐지까지 해야 하냐는 말들이 최근 나도는데, 웃기는 소리다. 국보법은 언제든지 피가 돌고 악마의 영혼을 불러들여 되살아날 수 있다. 이걸 가만히 두고 어떻게 편히 살 수 있단 말인가?” 
 
전례 없는 행동주의 전시
 
‘A4 자유전’이 갖는 의의 중 하나는 그 동안 국보법 폐지 입장을 견지해 왔던 작가들뿐 아니라, 이와는 무관해 보였던 작가들까지 폭넓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성금씨와 함께 실무기획을 담당한 이섭씨(전시기획자)는 “민예총이나 민미협을 중심으로 행사를 기획하면 1천여 명 정도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지만, 그분들은 이런 기회가 아니더라도 국보법 폐지 의견을 내 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참여인원은 줄더라도 참여폭을 넓히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국보법 폐지를 위한 여론확산이라는 설명이다. 참여미술이 아닌 순수미술을 하는 사람들까지 국보법 폐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내는 것이, 작가 숫자 한명 늘리는 것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출품작품을 굳이 국보법 폐지 메시지를 담은 작품에 국한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획의도에만 동의한다면 풍경화건 정물화건 상관치 않고 받고 있다. 매번 국보법 폐지를 외치던 ‘그 사람들’이 아닌,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가들이 국보법 폐지를 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현재 동참의사를 밝힌 150여 명 중 약 30%에 해당하는 작가들이 중도·보수 성향의 작가들인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다. 
 
작품크기를 A4 사이즈로 한정하고, 이메일과 팩스로 접수받는 독특한 전시형식 또한 참여폭 확대를 위한 ‘과감한 실험’이다. 전시장 한쪽에 인터넷과 팩스를 설치, 전시기간이 끝날 때까지 작품 접수를 계속해 최대한 참여인원을 늘릴 계획이다. 전시 후 출품작품을 각 정당에 전달하는데도 A4 사이즈가 효과적이라는 포석까지 깔고 있는 기획방식이다.  
 
안성금씨는 “‘A4 자유전’은 행동주의 전시, 실천이 따르는 전시방식으로 이런 식의 전시는 이전에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전시목적 자체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격식을 차려 치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보법 폐지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동’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회 진행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미술계의 현실이다. 참여를 호소하는 과정에서 많은 작가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참여를 거부했다. 이섭씨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나쁘게 생각하면 자기 검열에 익숙해져 있다”는 말로 이유를 설명했다. “국보법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참여인원이 애초에 기대한 만큼 못 미치는 것도 ‘창조적 작업’ 이면의 ‘보수적 마인드’ 때문이란 설명이다.   

이섭 씨는 그러나 ‘이런 현실’을 확인한 것조차 이번 전시회의 성과라고 평가한다. 이씨는 “참여를 호소하기 위해 개인접촉을 하는 과정에서, 국보법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공론의 장에서 고민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말했다.    
 
일정을 마치기까지 총 500여 명의 미술인들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이번 전시회는 오는 11일 행사를 마친 후 여야 각 정당에 출품작품을 전달, 국보법 폐지를 향한 미술인들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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