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동대문시장은 1905년 5월 종로거리 포목상들이 주축이 돼 조성한 '광장시장' 이 모태다. 고무신.양동이.빨랫비누.치약 등 당시의 '첨단' 생활용품들이 거래돼 인기를 끌었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잿더미로 변한 뒤에도 재활용품. 미군부대물자 거래로 상권을 유지하다 57년 신식 3층건물을 올리면서 재도약의 기초를 닦았다.

한편 광장시장 부근 청계천 5, 6가 대로변에는 53년께부터 피난온 실향민들의 판자촌과 더불어 지금의 평화시장이 형성됐다.

재봉틀 한두 대를 놓고 '몸뻬' 를 만들거나 미군복을 염색해 파는 일이 평화시장의 주업이었다.

50년대 말 청계천 복개공사가 이뤄지고 봉제공장들이 빽빽히 들어서면서평화시장은 60~70년대 고도성장에 한몫 단단히 했다. 그 바탕에는 하루14시간 노동의 대가가 커피 한잔 값(50원)인 저임금과 극도로 열악한 근로환경이 있었다.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속체(옥체) 안녕하십니까. 각하깨선 저(희)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삼선계현(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아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깨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어 은미합니다. ...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단축하시고 일요일마다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

가난 탓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평화시장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全泰壹)이 69년 쓴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 내용이다.

70년 11월 13일, 22세의 앳된 청년이던 그가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 과 함께 분신자살한 사건은 나라 전체, 특히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자괴. 자책감을 안겨주었다.

사건 후 열린 추도예배에서 한 목사는 '우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러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러 모였다' 고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는 전태일의 말은 이후 노동.학생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고(故) 전태일 30주기를 앞두고 그를 기리는 홈페이지(http://www.juntaeil.com)가 개설됐다.

편지. 일기.사진 등 각종 기록을 담고 '헌화마당' 도 곧 마련한다고 한다. 사이트에 들러 전태일과 우리 현대사를 곰곰히 되짚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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