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이른바 ‘개혁공조’를 하겠다고 한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개혁, 과거사 진상규명 등 ‘3대개혁과제’ 처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 편을 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는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 등 각종 개혁입법을 추진한다면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으며, 의원들도 대체로 “쟁점 사안을 놓고 표결을 한다면 열린우리당과 같이 가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민주노동당 의원들 중 거의 유일하게 ‘국민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노회찬 의원도 자신의 의정활동일지인 ‘난중일기’(9월 12일자)를 통해 열린우리당과의 공조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하고 나섰다. “개혁입법들의 개혁성을 그나마 유지한 채 통과시키려면 ‘개혁공조’는 필수적이다. 한나라당과 ‘반개혁절충’을 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개혁공조’의 상대가 누구인지 자명”하다고 말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개혁, 과거사 진상규명 등이 ‘개혁의제’들인 것은 분명하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이후 줄곧 이 개혁의제들을 제기해왔다. ‘정치공학적 유불리’를 떠나 그래왔다. 특히 국가보안법 폐지가 그렇다. 그것이 진보정당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는 굳은 믿은 때문이기도 했지만,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한 지배권력의 횡포에 고통받고 있는 ‘피해대중’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보수정당들에 의해 독점되어온 한국의 정당․의회정치는 이 개혁의제들의 공론화를 저지하거나 지체시키고 왜곡시킴으로써 피해대중들의 고통을 철저하게 외면해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중에 국가보안법 폐지가 핵심적인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원내 다수당인 여당이 폐지 입장을 당론으로 확정한 작금의 상황을 민주노동당은 꽤 고무적이라고 여길 수 있을런지 모른다. 드디어 개혁의제의 관철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개혁공조가 필수적인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최근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는 보수논객 이문열의 ‘애정어린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안검사 출신 의원들을 ‘폐지반대 논객’으로 내세우며 자기 발로 ‘냉전-수구의 철창’ 속으로 다시금 기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그렇다.
 

 ‘민생개혁 전제조건으로 한 국보법 폐지 공조’ 내세워야
 
그러나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는 ‘진보야당’과 ‘거대한 소수정당’을 표방해온 민주노동당이 채택할 올바른 정치활동노선이 아니다.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는 개혁공조가 아니라 ‘개악공조’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번째,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안은 위장폐지안이다. 형법에 신설하겠다는 ‘내란목적단체조직죄’(87조의 2)와 ‘내란목적단체 선전선동죄’(90조 3항) 조항은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할 핵심적 이유가 되고 있는 이적단체 관련 조항 7조를 존치시키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형량마저 강화되어 있다.
 
열린우리당과 공조를 하겠다는 것은 이러한 위장폐지안에 동의하게 되는 것인 동시에 완전폐지라는 당론에 위배되는 것이다. ‘진보’야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은 여당과의 공조를 운운하기에 앞서 열린우리당의 위장폐지안이 갖는 문제점 비판에 주력해야 한다. 또 ‘거대한’ 소수정당으로서 원내 공조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민중·시민사회운동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완전폐지를 위한 대중투쟁에 나서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더욱더 심각하다. 기껏 위장폐지안 정도를 갖고 정치사회적으로 논란이 일고, 민주노동당이 여당과의 공조를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빈곤사회’의 확대재생산 기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더욱더 악화시킬 비정규직보호법이 열린우리당(그리고 한나라당)의 ‘묵인’ 하에 정부에 의해 입법추진되고 있다. 아직까지도 대부분이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발언권을 심대하게 침해할 수 있는 파견근로의 범위와 기간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이 법안의 핵심골자이다.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위장)폐지 추진(나아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간 대치)의 본질은 사실상 여기에 있다. 정치사회적 의제지형을 온통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으로 들끓게 하고서는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권리신장과 관련된 의제는 배제하거나 친자본적인 것으로 그 내용을 왜곡시키기 위한 ‘당-정 역할분담’(보수양당 공조)에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공조하겠다는 것은 열린우리당의 ‘반민중성’을 은폐하는데 일조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보안법 폐지의 공과마저 거대 여당인 열린우리당에게 빼앗기면서 그들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진보’야당으로서 위장폐지안 추진을 중단하고 민중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일침을 가해야 하며, ‘거대한’ 소수정당으로서 민중·시민사회운동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의제지형을 민중생존권 보장을 위한 의제 중심으로 변화시켜내야 한다. 백번 양보해서 위장폐지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국가보안법의 ‘가시적’ 폐지라는 성과에 목을 맨다고 해도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 개악 입법철회 등 ‘민생개혁을 전제조건으로 한 국보법폐지 공조’를 내세워야 할 것이다.
 
정계와 언론계 일각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개혁공조를 하겠다는 것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양당(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을 싸잡아 비판하던 ‘양비론적’ 태도를 버리고 대체로 ‘코드’가 맞는 여당 쪽에 힘을 실어주면서 양당구도에서 활동공간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민주노동당 내에서 개혁공조를 주장하는 인사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을 비판했던 것이 ‘양비론’이었던가? 민주노동당은 ‘진보’야당으로서 집은 다르지만, 같은 마을에 사는 ‘수구-보수’(혹은 ‘수구적 보수주의’와 ‘개혁적 보수주의’) 양대 정당을 비판한 것 아니었는가?
 
또 민주노동당이 과연 열린우리당과 대체로 코드가 맞는다고 할 수 있는가? 생태계 파괴에 반대하며 수십일 간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인사에 대해 “단식해서 죽은 사람 못 봤다”는 농을 서슴지 않는 이를 정점으로 하는 그 세력과 과연 코드가 맞는단 말인가?
 
원내 소수당인 민주노동당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온전한 국가보안법 폐지는 결코 타협과 절충의 산물을 낳는 원내 공조정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해대중들의 거대한 투쟁의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여당에 힘을 실어주었을 때 얻게 되는 것은 보다 넓은 의회정치 활동의 폭이 아니라 보수-진보 구도형성의 지체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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