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적대적 상호의존’이라고 불렸다. 미국이나 소련 모두 상대방과의 적당한 긴장관계와 대결 국면을 조성해 내부적인 단결과 통합, 정권의 안정에 이용해 왔다는 뜻이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 사정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남한과 북한의 관계 역시 비슷했다.

언론, 시민단체들에서는 대통령과 ‘조중동’의 관계를 이런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조중동과 시시콜콜한 언쟁만 일삼으면서 정작 ‘언론개혁’과 관련한 정책은 지지부진 내지 현상유지로 흐르지만 자신의 지지자들은 확실히 모으는 효과를 거둔다는 얘기다. 게다가, 노사관계나 이라크 파병 등 굵직한 쟁점들에서는 적대적이지도 않다. 서로 호흡이 잘 맞는다.

대통령은 그동안 끊임없이 ‘대기업 노동조합 때리기’를 시도해 왔다. 집권 초기에 그것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도 했다. 노동자 간 노동조건 격차 확대를 정권과 자본 탓만 하고 있다가는 돌아오는 것은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이라는 현실에서, 노동계 전체의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통령의 ‘대기업 노동조합 때리기’는 점점 더 ‘적대적 상호의존’이라는 틀에서 철저히 움직이는 것처럼 비친다. 이를테면, 지난 2월4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신춘포럼에서 대통령은 “임금상승률이 이대로 가다간 우리 경제 경쟁력에 심각한 위기가 올 것”이라고 했다. 지난 6월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가진 청와대 만찬석상에서는 격앙된 어조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운동가와 노동운동 리더들이 정치인들을 매도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 노동운동이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비정규직 문제에서 과연 그러하냐”고 힐난하기도 했다.

많은 정치학자들과 시민운동가들이 대통령과 현 정권은 DJ 정권과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공격받고 있다고 분석한다. 맞는 말이다. 오른쪽에서는 극우·수구세력이, 왼쪽에서는 민주·진보진영이 압박을 한다는 것이다. 둘 중에서 오른쪽의 공격은 대부분이 너무 터무니없고 황당하다. 좌파적 정책 운운하는 게 대표적이다.

대통령의 ‘반노동 사회적 포퓰리즘’

문제는 대통령이 이 황당한 공격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의 끊임없는 ‘대기업 노조 때리기’는, 극우의 공격이 황당함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전략적인 차원을 차지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극우의 참주선동에 맞선 ‘전략적 안티’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통령은 분명한 ‘반노동 사회적 포퓰리즘'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 대통령의 줄다리기가 시험대에 들어섰다. 대통령의 ‘반노동 사회적 포퓰리즘’의 약발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파견노동자를 모든 업종으로 확대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대기업 노조 때리기’를 벌여온 대통령은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초미의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노동부는 아주 ‘어이없는’ 법률 제·개정안을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명분으로 내놓았다.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개정안과 ‘기간제및단시간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제정안이 그것이다. 파견법은 현행 26개 업종에만 허용돼 있는 파견노동자를 건설·선원·의료 등 일부를 빼고 모든 업종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파견기간도 2년에서 3년으로 늘렸다. 쉽게 말해, 3년 고용했다가 내쫓고 3개월 기다렸다가 다시 파견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게 파견법의 핵심이다. 불법파견 단속·처벌 강화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1998년 2월 정부가 노동계의 양보를 얻어 파견근로를 합법화시키는 법률을 제정했을 때도 갖다 붙인 ‘구두선’이었을 뿐이다.

기간제법은 현행 1년을 넘지 못하게 돼 있는 근로계약기간 상한규정을 최대 3년으로 늘린 게 핵심이다. 3년이 지나면 해고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해고제한 규정’을 둔다지만, 3년 안에는 마음대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정규직 대신 계약직 노동자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활짝 문을 열어준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하다. 말끝마다 대기업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에 소극적이라고 질타하던 대통령이 정부의 이 정책에 대해 무엇이라고 할지 말이다. 막말로, 대통령의 입에서는 파견노동자가 지금보다 365일, 계약직 노동자는 730일 더 벌어먹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니 만큼 ‘개선’이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대통령은 지난 9월5일 문화방송 시사매거진2580에 나와 “노사정 대타협은 조금 더 노력을 해봐야겠다. 국민들은 노동자들이 너무 강경하고 전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다수의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강경하거나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지 않다. 다만, 몇몇 대기업 노동조합이 강경하고 지나치게 투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노사정 대타협? 텄다. 날 샜다는 말이다. ‘적대적 상호의존’이란 정치공학을 버리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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