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철폐는 안 된다’는 단호한 목소리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9월2일 국보법 제7조 제1항(찬양·고무죄) 및 제5항(이적표현물 소지죄)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자유까지 허용해 스스로를 붕괴시키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며 유죄 판결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도 지난달 26일 문제의 두 조항에 대해 재판관 9명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1991년 개정된 이후 “국보법의 입법 목적을 일탈하는 확대 해석 위험은 제거됐다”고 밝혔다. 심판 대상인 국보법 제7조 제1항과 5항은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한 범위 안에서 양심과 사상, 학술,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그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거나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대법원과 헌재의 결정은 그동안 인권 침해 소지가 크다는 비판을 받아온 현행 국보법 제7조 제1항과 5항은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결국, 입법 목적을 일탈하는 확대 해석이 이뤄져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국보법 자체가 아니라 그 적용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제7조 제1항과 5항에 대한 ‘개정’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이런 결론 앞에 당혹감과 허탈함이 밀려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일부 보수언론들까지 인정했던 국보법 개정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4·15총선 직후다.

<동아일보>는 5월8일 사설 ‘국가보안법, 현실에 맞게 고칠 때’에서 “남북교류가 활발해진 이후 법과 현실의 괴리가 커져 사실상 사문화한 개념이나 조항이 없지 않다”며 “특히 찬양·고무죄 등 몇몇 조항은 규제대상이 애매하고 다의적 해석이 가능해 독재정권 시대에 인권유린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고 썼다. <조선일보>도 5월1일 ‘국가보안법 논의해 볼 만하다’란 사설에서 “북한이 정부를 참칭하는 것만으로 반국가단체(국보법 제3조)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한가”라고 의문을 던졌다.

불과 넉 달 전 이 신문들의 모습은 헌재 결정과 대법원 판결의 정당성만을 알리기에 바쁜 지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중앙일보> 8월27일치 사설 ‘국가보안법 필요성 인정한 헌재’는 “(헌재 결정에 따라) 법 폐지론보다는 개정론에 한층 힘이 실리게 됐다”고 썼다. 그러나 무엇을 개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남북관계 진전에 맞춰 단계적이면서도 상호주의에 입각해 다뤄야 한다”고 할 뿐이다. <동아일보> 8월27일치 사설 ‘헌재 결정의 의미 존중해야’는 이들 신문이 내세우는 ‘개정’의 실체를 보여준다. “헌재는 일반 형사사건에 비해 구속기간을 20일 연장토록 한 제19조 등 일부 조항에 대해서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국보법의 개정이 불가피해졌지만 전면 폐지보다는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조항을 삭제하는 개정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다.”

일반 형사사건과 견줘 상대적으로 구속기간 연장일의 축소 정도가 이들 신문이 말하는 국보법 ‘개정’인 것이다. 4·15 총선 이후 잠깐 열린우리당의 과반수 의석 확보,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등에 밀려 제7조(찬양·고무죄) 및 제3조(반국가단체) 등의 개정에도 동의하던 이들 신문은 다시 잽싸게 ‘변신’한 것이다.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가 1993년 2월25일부터 1998년 2월24일까지 5년 동안 집계한 결과, 국보법 구속자 1989명 가운데 제7조가 적용된 수가 90%인 1791명이었다. 국보법 제3조가 적용된 5.5%(110명)를 포함하면, 두 조항으로 인해 구속된 비율은 전체의 95%가 넘는다. 그만큼, 제7조와 제3조는 국보법에 의한 인권 침해의 핵심에 서 있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 국보법 제7조와 제3조 자체에 문제가 없다고 치자. 이들 조항에 의한 수많은 인권 침해가 법 자체가 아니라, 법의 잘못된 ‘적용’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인정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그것도 매우 핵심적인 문제다. 누가 국보법의 ‘잘못된 적용’을 일삼았냐는 것이다.

슬프게도, 그동안 국보법을 잘못 적용해온 인물들은 여전히 검찰과 법원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들 인물들을 그대로 두고선 국보법은 제대로 적용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번 헌재의 결정과 대법원의 판결이 그 생생한 방증이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이번 헌재 결정과 대법원 판결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결론을 가리키고 있다. 자신들을 향한 부메랑이다.

‘국보법에 문제가 없다면, 그런 국보법을 잘못 적용해온 인물들을 청산하라!’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