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가 지난 7월 한 달 동안 벌인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캠페인이 끝났다. 직접 체험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적자’였다고 한다. 캠페인에 참가한 11명은 각각 1인~4인 가구를 꾸려 한 달을 났는데, 3인 가구 생활을 해 본 필자의 생생한 경험담을 싣는다. <편집자주>


체험 첫 날 3인 가구 최저생계비 83만8,800원을 받아들고 ‘잘만 살면 남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최대한 계획적으로, 최대한 아껴 써보자는 일념 아래 한 달 동안의 소비계획과 여러 가지 수칙들을 세웠다.

하루 세 끼 반찬은 두 가지, 과일은 사흘에 한 번, 외식은 한 달에 한 번. 이 치밀한 계획들로 인해 처음 열흘간은 별 어려움 없이 버틸 수 있었다.

첫날 샀던 콩나물 800원어치와 계란 한 판이 열흘 동안의 식탁에 매번 올라갔던 것도 그 당시엔 특별한 어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체험 전에 달고 들어왔던 감기가 낫질 않자 점차 두려워졌다. 보통 때 같으면 자연스럽게 낫는 감기였는데 이번에는 도통 나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나보다 더 당황한 (체험)식구들과 실무진들의 성화에 부랴부랴 감기약과 민간요법을 이용했다. 그러나 감기가 낫기는커녕 점점 심해져만 갈 뿐이었다.

나중엔 기침을 할 때마다 가슴통증이 심해져 병원에 가야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난 보름 만에 2kg이 빠져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에 세웠던 식단과 소비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동안 비현실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현실적’인 최저생계비로 살아가기

체험이 중반쯤 되자 여러 가지 욕구 불만들 때문에 생활이 힘들어졌다.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우리의 체험을 지켜보며 ‘사치를 부린다’는 지적이 못내 마음에 걸려 최대한 절제하는 생활을 했다.

망가진 우산 때문에 온 몸이 다 젖어도, 밑창이 뜯어진 슬리퍼 때문에 걷기가 힘들어도, 녹슬고 무뎌진 면도기 때문에 매일 아침이 고통스러워도, 우린 계속 참고 견뎠다. 그러나 욕구를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갔다.

온 집안에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던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찾아오자 그동안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했다.

음식물 쓰레기에 수백 마리의 구더기가 달라붙어 현관주변을 꿈틀거렸고, 집 앞 골목길엔 잡초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사람이 다닐 길까지 막아버렸다. 그것들을 처리하면서 몸도 많이 힘들었지만, 갑자기 닥친 일들 때문에 마음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무더운 날씨와 땡볕 더위는 그동안의 식단이 더욱 비현실적임을 몸으로 느끼게 해줬다. 우리는 모두 지쳐갔다.

설상가상으로 체험종료를 일주일 남기고 집 앞 계단에서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다. 피가 흐르고 다리는 부어올랐지만 이 예상치 못한 일들을 최저생계비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이 날 방안에 가둬버렸다.

고민 끝에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긴 했지만,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돈이 없다는 이유로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느낌은 마치 내가 다른 세상, 혹은 다른 시대에 와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체험이 끝나는 날 난 4kg이 빠져있었다. 세상 한편에선 다이어트로 살을 빼려고 난리들인데, 다른 한편에선 못 먹어서 살이 빠졌다는 사실이 서글퍼졌다. 그리고 더욱 슬퍼졌던 건 나는 한 달의 ‘체험’으로 끝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상’으로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빈곤을 바라지 않는다

한 달 동안 체험을 하면서 느낀 건 아무도 빈곤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상성에 갇힌 사람들은 사람들이 빈곤을 명목으로 정부에서 돈을 받아먹고 살려고 한다지만 우리나라의 최저생계비 수준은 가만히 받아먹고 살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우리나라의 최저생계비는 절대적 빈곤상태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책정돼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최저생계비는 자신에게 투자할 여지없이 단지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최저’, ‘최소’란 말이 바로 그 의미가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빈곤을 유지하는 것은 그 누가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바로 최저생계비는 빈곤의 유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한 달의 체험으로 여기저기 매스컴에 등장하며 빈곤의 현실을 논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본다.

나 역시 한 달의 체험으로 내 자신이 대단한 경험을 한 것처럼 떠들고 다니고 싶진 않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이러한 현실이 있다는 것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앵무새가 돼도 좋고 삐에로가 돼도 좋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추상성 속에 갇혀’ 자신의 상상력으로 사람의 생존문제와 결부된 최저생계비를 놓고 ‘높다’, ‘낮다’의 논쟁을 하는 것을 바라진 않는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이다.

그 현실은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갖고 지지를 보내준다면 바뀔 수 있는 현실이 될 것이다. 최저생계비는 현실화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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