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31일 밤 KBS 2TV에서 ‘한국경제 무엇이 대안인가’란 주제로 대토론이 방송됐다. 양대 노총 위원장과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한국경총 부회장, 전경련 전무 등 노사정의 비중 있는 인사들이 모두 참가했다.

예상했던 진단이나 발언이 있었지만, 과문한 탓인지 의외의 발언도 있었다. 이규황 전경련 전무의 말이었다.

투자 부진의 원인은 ‘주주자본주의 도입에 따라 경영진이 집착하게 되는 단기 실적주의, 크게 늘어나는 주주에 대한 배당금, 외국인투자의 급격한 증대로 인해 시간과 노력을 점점 더 쏟아야 하는 경영권 방어, 내국인을 역차별하고 경영권 방어를 어렵게 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제 등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5월11일 이화여대 최고경영자 특강에서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전경련은 현 부회장의 발언을 ‘개인의견’이라고 변명했지만, 이 전무까지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전경련의 공식 의견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주주 배당금 늘어 투자여력 없다고?

나는 단기 실적주의의 폐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뜻을 나타내며, 전경련의 이런 공식 의견에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한다. 먼저 주주에 대한 배당금이 늘어나 투자 여력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배당률(배당금/자본금)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98년 4.1%이던 배당률은 2001년 5.4%, 2002년 6.4%, 2003년 7.7%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주주에게 배당한 이후 남는 현금(단기예금 포함)이 총자산에 차지하는 비중 역시 같은 기간 동안 6.5%, 6.0%, 8.1%, 9.7%로 높아지고 있다. 적어도 배당금이 늘어 투자여력이 없어진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경영권 방어에 대비해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는 설명도 그렇다. 마땅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어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역시 설득력이 없다.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자사주 구매를 이용하고 있다. 구매한 자사주를 우호세력에게 매각하면 경영권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자사주 취득 증가율(전년 대비)은 2000년 227.9%, 2001년 34.4%로 급증했고 2002년 -7.8%로 주춤한 뒤 2003년 34.6%로 다시 크게 늘었다. 자사주 취득이 급증했음에도, 자사주 취득 이후 남는 현금보유비중 역시 계속 크게 늘어왔다는 사실은 여기서도 주목돼야 한다.

게다가 이날 토론회에서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은 “경영권 분쟁중인 회사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증자를 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사주 구매는 의결권 행사를 위해 우호세력에게 배분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런 번거로움을 없애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방법은 간단하다. 증자할 때 우선주와 보통주를 섞어 발행하면 된다. 우선주는 의결권이 없고, 보통주는 의결권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차등의결권주가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우선주와 보통주는 한국식 차등의결권 제도이기 때문이다. 0 대 1의 의결권 차이는 1 대 무한대의 의결권 차이나 마찬가지다.

투자 부진의 원인을 주주 자본주의에서만 찾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지닌다. 이 코너를 통해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나는 재벌의 ‘투자 스트라이크’가 투자 부진의 큰 측면을 이룬다고 판단한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가 주의를 환기시켰듯이, 지금의 투자율은 과잉투자가 급증했던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직전과만 비교해서는 곤란하다.

2000~2003년 설비투자율(국내총생산 대비)은 10~13% 수준이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인 70~76년은 8~12%, 중화학공업화 시기인 77~79년은 14~17%, 80년대 중반은 12~13%, 90년대 중반 15% 정도였다. 이렇게 넓혀보면, 지금의 투자 부진 원인을 주로 주주 자본주의에서 찾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투자 부진의 핵심은 ‘투자 스트라이크’

한국은행이 지난 7월26일 발표한 보고서 ‘최근의 설비투자 동향과 특징’을 보면, 투자 스트라이크를 뺀 투자 부진의 원인이 상세히 정리돼 있다. 먼저 수출의 국내투자유발효과 약화이다.

수출 증가로 설비투자가 증가하고 있는 반도체, TFT-LCD(박막액정화면) 및 휴대전화 등 정보기술 업종의 생산설비 수입의존도가 높다. 이로 인해 이들 업종의 설비투자가 늘어도 국내 자본재 산업의 생산 등에 주는 영향력이 크지 않다.

두 번째는 1999~2000년 대규모 투자가 이뤄진 자동차의 내구연한이 상당히 남아 있어 선박·항공기를 제외한 운송장비 투자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내수 부진 장기화 가능성, 지정학적 위험, 노사관계 불안 등에 따른 포괄적인 불확실성에 따라 투자심리 회복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 한국은행이 꼽는 세 번째 요인이다.

네 번째가 바로 주주 자본주의에 원인을 돌릴 수 있는, 중장기 투자 기피 등과 같은 기업경영의 보수화이다. 그 밖의 요인으론 해외투자 증가가 꼽힌다.

아무래도 지금은,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재벌개혁이 주주 자본주의 부추긴다’는 전경련 논법의 함의를 간파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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