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늦은 시각 축구중계를 보지 않고 한국방송의 심야토론을 끝까지 보았다. 희망이 보인다지만 나는 많이 슬펐다.

IMF 구제금융이 개시되면서 한국 정부가 양해각서를 통해 IMF에 약속한 정책패키지의 실행과정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러할 것이다. 우선 노동영역에서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하고 노동자공급사업에 관한 노동조합의 독점을 허물어 파견노동을 합법화하였다. 거시적인 차원의 핵심 정책은 외국자본의 국내 주식 취득에 관한 규제를 대부분 해제하고 부실 우려가 있는 금융기관을 통폐합해 거대 외국자본에 넘기도록 했다. 이와 함께 채권회수를 보장하기 위해 최소한의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영역을 제외하고는 정부지출을 최대한 억제하도록 했다.

그것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기업들은 정리해고 뒤의 빈 자리와 회복기의 필요노동력을 임시직, 일용직,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으로 대부분 메꾸었다. 초국적 자본은 바닥으로 내려앉은 한국 증시에 뛰어들어 유수의 민간기업과 금융기관, 재벌그룹의 주식을 사들였고,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구어낸 위기극복의 성과를 투자금의 몇 배에 달하는 막대한 시세차익과 배당금으로 챙겨 빼내갔다. 정부는 민영화, 민간위탁, 인원감축, 증원억제 등 온갖 수단을 내세워 공공부문의 지출을 줄여나갔고, 그 상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만성적 불안으로 남게 되었다.

한국 경제가 마침내‘위기’를 극복한 비밀은 한편으로는 중국이라는 폭발적이고 불안한 거대 성장엔진의 한켠에 편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용카드라는 희대의 거짓된 유효수요 창출기를 전 국민에게 무차별적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부족한 가처분소득에 미래의 빠듯한 소비분을 앞당겨 지출하도록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수출산업의 활약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 성장 역시 각 기업내 노동시장과 산업간의 현격하고 거대한 분절을 부인하지 못한다.

경제구조의 최상층에는 초국적 투기자본과 함께 살아남아 경영권과 그룹지배권을 유지하고 있는 재벌가의 총수들이 자리하고 있고, 그 다음으로 금융자산과 부동산의 회생조치에 이득을 본 자산계층들이 중국산이 넘치는 국내시장에서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자식과 부모들이 모두 해외소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칼날에도 살아남은 노동계급의 상층은 죽어간 동료들의 시쳇더미 위에서 육체와 영혼을 손상당한 채‘살아남은 자’의 악착같은‘불안 스트레스’에 시달리며“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자”는 심리와 함께 약간의 죄책감을 노조운동을 통해 벌충하려 하고 있다.

반면 우리 사회의 밑바닥은 폐허가 되었다. 비정규직으로 전락한 트럭운전기사는 회사가 떠넘긴 차량을 가졌다는 이유로 노동자 취급도 못 받고 있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난 카드빚에 신용불량자 신세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가족들을 망연자실한 채 지켜보고 있다. 젊은이들은 월 백만원 안팎의 임금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쌀과 라면과 중국산 옷가지들을 구입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비여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처지에 놓였다. 결혼을 꿈꾼다고 한들 수십만원에 달하는 종일반 탁아비를 감당할 길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자식’은 사치재일 뿐이다. 산업인력의 세대순환이 막힌 문제만큼이나 노동운동의 자기재생산도 위기에 빠져 있다.

더구나 여성노동자의 70퍼센트 이상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신세인 상태에서는 혼자 살아가는 것조차 세상은 그들에게 충분한 고역이다.

영세상인들이 희망을 놓고 전망이 불투명한 중소기업주들 일부가 더 힘없고 초라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은 차마 더 못할 말이다. 그러니 연 수백만원의 수입에 수천만원의 부채를 지고 있는 농민들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다시‘경제위기’를 말하고 있는 이 나라의 경제주체들은 우선 타자를 향한 손가락을 세우기 전에 거울부터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재벌이 살아남았고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까지 회생했다면 대기업 노동자들도 이익과 성장에 대한 자기 몫을 주장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노동자들이 그나마 염치가 있어 비정규직과 지역사회, 협력업체 노동자들에 대해 일말의 예의나 명분이라도 차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판단이 영민하지 못해 그러한 예의가 충분하다고 말하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신바람이라도 난 양‘개조와 혁신’을 주장할 처지도 못된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 집행유예 결정으로 잠시 풀려난 송두율 교수가“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를, 승자보다는 패자를, 같은 편에 있는 기회주의자보다는 진정한 시민과 고상한 보수주의자를 더 높이 샀던”슈테판 헤름린의 에세이집 <저녁노을>의 한글번역판 추천사에 썼던 말을 잊지 못하겠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떠나 자신과 한 약속이라도 제대로 지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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