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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목소리로 진실을 말하다쿠르드족 최초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때로는 현실도 믿기 힘든 세상이다.

수십 명을 아무 동기 없이 죽이는 현실 속 살인마를 이해하느니 드라마 속에서 재벌 2세가 피아노를 치며 평범한 여성에게 구애하는 고전동화적 설정에 포옥 빠져 들어가는 것이 바로 또 다른 현실이다.

사회가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서 각박해질 때 영화, 드라마, 소설들은 신데렐라류의 극단적 단순 멜로가 아니면 아주 현실을 탈피한 판타지로 일관되게 된다.

드라마 속의 재벌 2세는 절대 내 남자친구가 될 수 없으며 내게는 손바닥에서 거미줄을 발사할 능력도, 마법으로 세상을 구해 낼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 불과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

현실을 벗어나는 즐거움을 탐닉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을 향한 강한 부정의 정서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꾸밈없는 진실, 말도 취해야 하는 차가운 눈밭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A Time for Drunken Horses>은 해외에 소개된 대다수 이란 영화가 그렇듯 가난하고 순수한 어린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가슴 뭉클한 감동 드라마다.

국내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등 압바스 키에로스타미류의 영화들 때문에 이란 영화가 이미 국내에서도 낯설지는 않다.

<취한 말들을····>의 감독 바흐만 고바디 역시 키에로스타미의 조감독을 거쳤다. 그러나 키에로스타미를 벗어난 고바디는 정작 자신의 작품에서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배경과 동심을 주로 그려내던 스승과는 다른 스타일을 연출한다.

첫 장편영화인 이 작품에서 그는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터키의 국경지대에 살며 극심한 가난과 온갖 탄압 속에 시련을 겪는 쿠르드족들에 대한 날카로운 증언을 하고 있다. 키에로스타미의 카메라가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관조했던 쿠르드족 마을이 고바디의 시선에서는 삶과 훨씬 가깝게 밀착돼 혹독한 아픔까지 훨씬 세밀하고 충실하게 클로즈업 된다.

어머니가 막내를 낳다가 죽고, 아버지는 국경지대에 횡행하는 밀수업자들을 따라 나섰다가 지뢰를 밟아 죽었다. 그렇게 세상에 홀로 남겨진 4남매는 온갖 잡일과 어른들의 밀수수단으로 이용되는 날품을 팔기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14살짜리 가장이 된 장남 이윱은 뼈가 빠지게 일하지만 먹을 것을 사고 나면 여동생 공책을 사주기도 빠듯하다.

이들 4남매의 가장 큰 소원은 외소증에 걸려 한 달 안에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게 될 형 마디를 살리는 일이다. 큰딸 로진은 마디를 수술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팔려가듯 시집을 가지만 신랑 집에서는 노새 한마리를 던져주며 마디를 다시 남매들에게 떠맡긴다.

이라크에 가면 노새를 더 비싸게 팔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수술비를 마련하려는 장남 이윱은 노새와 함께 무장강도와 지뢰가 난무하는 국경으로 향한다.



역설적으로 하얗고 깨끗한 눈보라로 덮여있는 고통의 세상. 노새나 말조차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술을 탄 물을 먹어야 하는 험난한 국경지대.

무장강도의 습격에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노새는 꿈쩍도 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새를 버리고 달아날 때 노새가 형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인 이윱은 눈물을 흘리며 “제발 나와 같이 가 달라”고 노새에게 애원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이렇게 현실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장면만큼은 매우 시적이다. 눈으로 뒤덮인 험준한 산악지대의 풍경은 투박한 아이들과 주민들의 모습과 어울려 눈을 뗄 수 없는 자연스러운 연출을 한다.

길게 늘어진 노새 행렬이 밀수용 타이어를 싣고 국경을 넘는 원경 장면은 그야말로 자연이라는 결정적 세트에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명장면이다.

김경란 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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