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공동체’. 가슴 설레는 구상이다. 하지만 이미 이런 가능성이 상당부분 ‘텄다’.

현 정권이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MD) 체제에 참가한 순간, 중국에 대한 정치·외교적 지렛대는 상당 부분 상실됐기 때문이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 지방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패권을 행사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동북아 공동대응의 필요성은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이 지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표적이다. 얼마 전 이라크 추가파병을 결정하며.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은 미국에 대한 항의서한을 발표한 적이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아주 웃기는 짓거리로 비친다. 자기들이 속한 열우당이 당 차원에서 헌법을 어겨가며 추가파병을 결정한 행위를 호도하는 처사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우당 의원들의 이런 행동이 어떤 전망 속에서 의식적으로 이뤄질 경우 긍정성을 담을 수는 없을까.

다자간 협력 구도의 활용 원칙

한겨레 7월9일치 이종원 일본 릿쿄대 교수(국제정치학)의 ‘다국적군으로는 안 된다’는 칼럼이 그런 전망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더욱 큰 비극, 나아가 한국 내에서 테러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이라크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새로운 체제의 형성을 한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테러와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을 반복하는 것도, 이라크에서 즉시 철수하라는 주장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다. 지금과 같이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이며,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편 지금 이라크에서 각국이 전면 철수할 경우, 수습하기 어려운 혼란과 분쟁이 뒤따를 것도 거의 확실하다. 사실상의 미군 점령체제를 대신할 명실상부한 국제적 지원체제를 형성하는 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이 연계한 외교 노력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해볼 시점이다.

궁극적으로는 유엔의 주도 아래 유럽연합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중동 이슬람 각국, 나아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립적’이며 중동지역과 호의적 관계를 유지해온 한·중·일 등 동아시아가 포괄적으로 관여하는 체제 구축이다. 우리 정부도 또한 일본도 이제까지 이라크 전쟁에 대한 협력을 에너지 확보나 대북정책 등 너무나 좁은 ‘국익’ 차원에서만 설명하고 행동해 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동아시아 공동체’의 공통의 과제로서 이라크의 부흥과 안정이라는 새로운 시각과 실천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다.”

비단, 정치·외교 분야만이 아니다. 경제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문제에 대해 진보진영이 ‘방어적 반대’가 아닌 ‘능동적 대응’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저 반대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한·중·일 FTA 체결 문제는 유럽연합 형성과 비슷한 사안의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유럽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유럽연합 형성에 찬성했던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기획과 전망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덕목은 근시안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재계가 한-칠레 FTA 체결 문제에 대해 보였던 태도가 그것이다.

재계는 농민 부문을 고립시켜 격파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재계가 한-일 FTA 체결 문제에 대해서는 영 딴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4단체는 지난 7월13일 ‘한-일 FTA 대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에서 나온 핵심 주장은, 경쟁력이 취약한 제조업 분야 대책을 마련하면서 2~3년 안에 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2005년으로 예정된 양국간 협정 체결을 늦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중국과는 3~4년 안에, 미국과는 5~7년 안에 협정을 맺자는 ‘연기론’이었다.

자주적인 식량외교 펼쳐야

중국과 일본이 주도권을 다투는 이런 개별적인 FTA 체결 움직임을 하나의 틀로 묶어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리하다.

개인적으로는, 일단 쌀 시장 개방협상이 그 시험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관건은 동북아 3국이 쌀과 제조업 부문의 연계를 차단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은 가장 강력한 개방 압력을 넣고 있다. 소비자들이 외국 쌀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압력을 한국은 미국을 동원해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이미 중국은 식량 수입국이다. 동북아 3국은 쌀 개방협상에서 공동 대응을 시험해 볼 수 있다. 3국 사이에 한국과 일본이 추가로 수입하는 쌀을 북한 및 이라크 재건, 아프리카 지원 등에 사용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끌어내 보는 것이다.

이는 유엔 산하 세계식량기구(FAO)에 여분의 쌀을 적립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모두 미국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들이다. 문제에 정답이 없다면, 문제를 수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한 지렛대는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MD 체제 참여에 온 몸으로 저항한 DJ는 알고 있었다. 이제, 남은 유일한 지렛대는 결국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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