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급락 채권값하락(금리상승) 원화가치하락(환율상승) 등 금융시장의 ‘트리플 약세’가 심화되면서 위기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정말 ‘제2의 경제위기’를 운운할 정도로 현재의 금융시장 상황이 그토록 심각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외환부족으로 나라경제가 도탄에 빠진 97년 때처럼 도처에서 감지되는 ‘위기의 전조’를 ‘펀더멘털(경제기초여건)’타령으로 은근슬쩍 피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 경제전문가는 “일반병실로 옮겨진 한국경제가 세상에 나갈 적응훈련을 하고 있다가 고유가와 대우차 인수무산 등 외생변수에 일격을 맞아 다시 휘청거리고 있다”며 “중환자실로 옮겨야할지 여부는 향후 구조조정 의지에 달려있다”고 진단했다. 》

▼자금시장/돈 넉넉하지만 편중 심각▼

전문가들은 우리 자금시장을 한마디로 ‘체한 상태에서 아플 때마다 진통제를 맞으면서 겨우 살아가는 국면’이라고 흔히 비유한다. 이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근본처방 없이 수개월 째 끌고 가면서 시장참가자들의 불안심리를 필요 이상으로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 시중 실세금리와 기업부도율, 총통화(¤) 증가율 등 각종 경제지표를 볼 때 자금시장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증거는 쉽사리 찾아내기가 어렵다. 우선 총통화증가율이 올해 들어 25∼35%의 증가율을 유지하면서 시중에 자금은 넉넉한 편이다. 또 최근 대우차 매각 실패로 회사채 금리가 9%대에 재진입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례적인 저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행 이상우(李相雨)자금시장팀장은 “만약 금융경색이 극도로 악화된 것이 현실이라면 어음부도율이 치솟아야 할텐데 여전히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며 “주가폭락의 원인을 찾다보니 자금 및 금융시장의 불안이 증폭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분명 우리 자금시장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금융기관의 중개기능이 거의 상실돼 자금편중현상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자금이 몰리는 우량은행들도 가계대출에만 치중해 기업 자금난을 부채질하고 있는 측면도 강하다.

이같은 자금편중현상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데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부실한 기업이 정리되지 않으면서 향후 금융기관의 부실이 또다시 늘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과연 정부가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신속하게 처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지동현(池東炫)연구위원은 “오랜 기간 금융기관 및 기업의 수술을 못해왔다는 사실이 과연 앞으로도 이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있다”며 “특히 의약분업사태와 한빛은행사건 처리 등에서 보여준 정부의 정책능력에도 불신이 높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즉 현재를 엄밀히 위기국면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언제든지 위기로 치달을 수 있는 암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현 금융시장과 자금시장의본질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환율/아직은 안정세-단기외채 증가 우려 시각▼

우리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직전과 유사하다는 얘기가 흘러나
오고 있지만 파국을 얘기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직 외환시장은안정됐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다시 IMF체제를 맞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로 외환시장의 안정을 들고 있다.

실제 지난달에는 정부의 개입이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원―달러환율이 거의 변동되지 않은 안정세를 보여 외환딜러들이 태업사태를 벌이기까지 했다. 우리 외환보유고는 900억달러를 넘어서 환투기 공격에도 어느 정도 방어력을 갖게된 상태다.

그러나 외환시장의 안정을 과연 우리 경제 펀더멘털의 안정을 반영한 것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최근들어 외국인자금이 유출기미를보이고 있는 것도 우리 경제에 대한 펀더멘털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외국인 자금은 6월 20억달러 이상 들어와 최고조를 보인 이후 금융시장 불안과 맞물려 점차 감소추세를 보여 이달에는 올들어 처음으로 순유출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삼성투신운용의 관계자는 “지금까지 외국인자금이 들어온 것은 우리 기업이 체질개선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봤기보다는 97년말 환란이후 워낙 주가가 많이 떨어진 요인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체질개선이 제대로 되지 않 가운데서 고유가 등 대외경제환경이 악화되자 우리 기업들은 또다시 몸살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이 기업이 어려워 지면 해외 금융기관들은 국내 금융기관이 어려워질 것으로 보고 차입한도를 줄이게 되며 이는 곧바로 국가신용등급으로까지 연결된다.

한국은행 유종렬(劉種烈)외채분석팀장은 “최근들어 단기외채가 늘고 있는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라며 “또 우리 경제는 워낙 대외변수에 민감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외환보유고가 충분하다 하더라도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주가/기업 허약체질 폭락 불러-붕괴가능성은 없어▼

국민의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극복을 자화자찬하는 사이에 종합주가지수는 ‘IMF 수준’(500선대)으로 주저앉았다.

1000억원대에 육박하는 외환보유액, 흑자기조의 무역수지, 사상최대의 기업실적 등 이른바 양호한 ‘펀더멘털(경제기초 여건)’측면에선 현재의 주가수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혹자는 증시붕괴를 우려하기까지 한다.

과연 현 증시는 위기의 국면인가.

리젠트자산운용 이원기 사장은 “주가 하락폭이 크다고 해서 지금의 증시상황을 IMF 당시와 견주면서 ‘위기국면’으로 부풀릴 필요는 없다”고잘라 말했다. 실제로 전세계 주요 주식시장은 하락폭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금리상승에 따른 세계 유동성의 축소, 고유가 등 증시를 둘러싼 외생변수도 비슷하다.

이사장은 “그런데도 한국증시의 하락폭이 큰 것은 기업체질이 조그마한 외부변수의 변화에도 흔들릴 정도로 취약하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기업들은 ‘저유가 저금리’ 및 전세계적인 호황국면에 편승, IMF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듯 보였지만 구조조정을 게을리하면서 근본적인 체질개선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사상최대의 순이익도 영업력의 향상이라기보다는 저금리 등 외부여건이 좋아진 데 따른 측면이 크다. 예컨대 상장사의 평균 부채비율은 6월말 현재 136%로 97년말(350%)에 비해 크게 낮아졌지만 이 또한 ‘신기루’라는 지적이다.

KTB자산운용 장인환사장은 “자산매각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부채규모를 줄이지 않고 유상증자 등 자기자본을 대거 늘린 결과 부채비율은 하락했지만 실질적인 ‘부채’는 줄지 않는 기형적인 상황이 됐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국내적으로는 금리가 조금만 상승하더라도 기업도산→자금시장 위축→신용경색→시중자금의 부동화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으며 밖으로는 고유가와 반도체경기 둔화로 대표되는 외생변수에 직격탄을 맞아 휘청대는 상황에 이르렀다.

포드사의 대우자동차 인수포기도 역설적으로 외국인들에게 ‘국내 기업의 부진한 구조조정’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이것이 외국인들의 ‘셀 코리아(한국주식 팔기)’로 이어진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이사장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인데 때마침 외생변수마저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여건은 오히려 악화됐다”며 “증시가 이런 상황을 선반영해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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