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투자를 무기로 삼아 현 정부를 상대로 두 번의 ‘자본 파업’을 벌였다. 모두 대성공을 거뒀다. 한 번은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전후한 지난해 4월과 5월에 발생했다.

북한 핵 문제가 북-미 관계의 핵심으로 불거져 있던 때였다. 재계5단체는 2003년 4월3일 집단성명을 발표한다. 경제위기 타개를 위해 투자를 확대할 테니 정부는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 재정정책을 적극 펼치고 출자총액제한제도 강화, 금융계열사 분리 등은 신중히 추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2003년 5월11일 대통령의 미국 방문 당시 손길승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비롯한 재계5단체장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 24명으로 이뤄진 경제사절단이 대통령을 수행했다.

그리고 2003년 5월29일 재계5단체는 “경제위기를 효율적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기업의 투자 확대뿐”이라며 “삼성,엘지 등 14개 주요그룹이 연초 수립한 투자계획 25조1천억원보다 3.1% 늘린 25조9천억원을 2003년 중 투자할 계획이며, 이 가운데 67%에 해당하는 17조5천억원을 5월 이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재계가 이 약속을 지켰는지는 알 길이 없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전환점으로 참여정부의 개혁적인 모습을 자취를 감췄고, 수구언론을 상대로 한 대통령의 이미지 관리용 ‘말싸움’만 난무했다.

자본 투자의 정치적 성격

재계는 지난 5월27일 이른바 ‘투자 확대’라는 선물 보따리를 정부를 상대로 풀어놨다. 삼성그룹은 애초 계획(17조4천억원)보다 10% 이상 늘어난 19조3천억원을 올해에만 투자하는 것을 포함해 2006년까지 7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엘지그룹은 앞으로 5년간 50조원, 에스케이그룹은 2007년까지 15조~20조원, 현대차그룹은 2004년 5조8,800억원 등 해마다 5조5천억원대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들 4대 그룹은 올해 채용인원을 3만6,500명으로 늘리겠다는 약속도 내놨다. 지난 5월25일 대통령과 재계의 ‘청와대 회동’ 직후의 일이다.

두 번째 ‘자본 파업’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정부가 재계에 어떤 양보를 했는지 그 전모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재벌은 지주회사에 대한 규제완화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현재 지주회사는 자회사가 아닌 기업의 주식을 5% 초과해 소유할 수 없지만, 이런 비자회사 주식보유액이 자회사 주식보유액의 15% 미만이면 예외를 인정받게 됐다.
재벌 소유 금융계열사에 대한 의결권을 현행 30%에서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06년부터 3년간 단계적으로 5%포인트씩 축소하는 쪽으로 느슨하게 규정한 것도 재계, 특히 삼성그룹에게는 선물이다. 애초 1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자는 제안은 열린우리당이 내놨었다.

이번에는 재계의 이런 투자 약속이 이뤄질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재계의 투자 확대 약속은 ‘반기업적인 정부(특히 공정거래위원회) 정책’으로 투자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높였던 자신들의 주장을 행동으로 뒷받침하겠다는 일관성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개인적인 판단이다.

그동안 했어야 하는데, 총선 이후로 미뤄뒀던 투자를 시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부 정책이 바뀔 조짐을 보인다고 계획에도 없던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결정하는 자본이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다.

실업률, 너무 높아도 너무 낮아도 안된다?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재계의 모습을 보면 떠오르는 경제학자가 한 명 있다. 폴란드 출신의 걸출한 경제학자 미카엘 칼렉키(1899~1970)다. 그는 케인스보다 앞서 케인스주의의 핵심을 이론화했지만, 영어가 아닌 폴란드어로 출간돼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칼렉키의 이론 중에 ‘정치적 경기순환’ 모델이 있다. 칼렉키는 지속가능한 완전고용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업이 너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면 생산에서 노동자의 노력이 줄어들고, 이는 이윤을 감소시킨다. 완전고용을 쫓는 진보정당이 집권하고 있으면, 이럴 가능성이 더 커진다.

자본으로서는, 경제가 완전고용 이하에서 작동할 때에만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자본은 통제력 회복을 위한 스트라이크, 곧 인위적인 투자 축소에 나선다. 이로 인해 경기 하강이 시작된다.

하지만 완전고용 이하 수준에서 지속되는 경기둔화 역시 이윤을 감소시킨다. 지나친 실업은 노동자의 반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이 성장의 하한선을 규정한다. 칼렉키의 정치적 경기순환 모델을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비록 재계가 칼렉키의 모델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투자 축소를 통해 경기 하강을 유발한 것은 아니지만, 투자 연기라는 수단을 통해 경기 둔화를 연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비정규직 차별철폐에 소극적인 재계의 칼끝이 정부를 향하고 있다는 함의도 칼렉키의 모델에서는 새롭게 부각된다.

그렇다면 현 정부 아래에서 벌어지는 자본 파업의 악순환은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칼렉키의 모델은 ‘노동의 반란’에 해당하는 어떤 역관계의 전환이 있어야 함을 암시한다. 노동계 내부 단결은 그 시작이다.

조준상 전국 언론노조 교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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