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선거는 과정과 결과에서 많은 변화를 실감케 하였다. 청년층의 적극적인 참여로 투표율이 높아졌고 젊어진 정치 신인이 대거 등장하여 시민운동이 바라던 물갈이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여성의 진출은 괄목할 만큼 증가하였다. 특히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탄핵소추한 상태에서 치러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로 인한 파동이 선거 전 과정을 관통하면서 이 나라 정치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여당쪽은 전국적인 거대한 촛불파도를 타고 선거판을 ‘탄핵응징과 심판’으로 몰아갔고 위기에 몰린 야당은 지역감정을 자극하면서 ‘거대여당 견제론’으로 맞섰다.

이념이나 정책 대안은 처음부터 설 자리가 없었다. 한나라당, 자민련은 그들의 지역패권의 성지를 맴돌면서 낡은 지역감정과 향수에 매달리는 냉전 수구의 전통적 수법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극우 언론들은 온갖 변설을 동원하여 이들을 엄호 지원하고 심지어 군사쿠데타로 좌익정권을 몰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저주도 서슴없이 퍼부어졌다. 정통 야당이라 자처하는 민주당이나 낡은 정치의 청산을 외치는 열린우리당도 지역을 이용하는데는 예외가 아니었다. 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의 광주에서의 눈물어린 삼보일배나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부산?경남지역 공들이기도 노무현 대통령의 연고지를 활용하려는 지역주의 관성의 표출이었다.

국민들은 야당의 추잡한 꼼수도, 여당의 압승만을 노리는 불손한 자만도 용납하지 않았다. 스스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농락한데 대해 냉정히 심판하고자 했다. 국민들은 거대 야당 한나라당을 왜소한 지역정당으로 축소시켜 버렸고 민주당과 자민련에 대해서는 존립의 의미를 물었다. 여당의 노풍에 대해서도 지지율 철회로 답하였다.

냉전 수구세력의 완강한 저항을 넘어서

정책 이념 부재의 선거판에서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심판의 기준으로 삼아 탄핵을 저지른 쪽에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렇다고 노무현 정부를 선뜻 지지하지도 않았다. 겨우 절반을 넘기는 절묘한 선택을 통해 노무현 정부에 경고를 발하였다. 집권 1년에 불만이 많아도 그보다는 국민을 무시하는 탄핵세력 응징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지지를 철회하고 엄혹한 심판을 내릴 수도 있음을 국민들은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국민들은 “노무현 정부는 과거에 대해 냉정한 자기비판과 함께 참여정부에 걸맞는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처럼 총선거는 권위주의 시대를 훨씬 벗어나 높이 성장한 정치의식을 표출시켰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활기차게 관류하고 있는 역동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낡은 질서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다. 친일 친미 군사 독재정권이 쳐놓은 지역주의의 저인망이 아직도 민주발전의 발목을 부여잡고 있고 맹목적인 냉전 수구세력의 저격수들이 ‘악마의 주술’이라는 지역패권주의 그늘에서 완강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국민의 대표라고 강변하면서 외세를 등에 업고 가진 자의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제 냉전 수구세력의 패퇴는 대세임이 분명해졌다. 그 대신 국민들은 수구 대 보수개혁의 혼합구도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결,경쟁시대로 진입하라는 역사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억눌려 살아온 자, 땀흘려 일하는 자, 세상의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참다운 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쟁취해 가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진출은 바로 이러한 상황변화에 따른 국민들의 역사적 선택이자 요구이었다. 이제 이 나라의 정치는 냉전 수구에서 탈바꿈하려고 몸부림치는 한나라당과, 개혁을 표방하는 새로운 보수 열린우리당 사이에서 민주노동당이 어떤 진보정치의 상을 만들어 갈 것인가 역사적 실험을 시작하였다.

지난한 역사를 밑거름으로 한 화려한 진출

민주노동당의 성과는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지역구든 비례대표든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율을 확보함으로써 지역에 의존한 다른 기성정당과 달리 ‘전국 정당’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짧은 역사와 법률, 제도상의 제약, 경험의 미숙, 재정적, 인적 한계를 물리치고 오늘의 성과를 일구어 낸 것은 오로지 열성 당원과 당 지도부가 흘린 땀과 눈물의 결과이며 특히 지역구에서 당선을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뛴 후보들의 노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그 싹을 찾는다면 7년만의 일이고 정식 민주노동당 출범으로 치면 4년만의 쾌거다. 이미 2002년 지자체 선거 때 광역단위에서 고루 득표하여 자민련을 누르고 8.13%의 득표율로 제3당의 위치를 확보한 후 2년만의 일이기도 하다. 이제 2004년 원내 진출계획은 실행된 것이고 2008년 원내교섭단체 구성, 2012년 집권이라는 계획도 마냥 꿈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민주노동당의 진출은 외세와 빈곤, 부패와 불평등으로 가득한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는, 오랫동안 민중이 바랐던 꿈을 반영한 것이다. 민족자주 평화통일을 이룩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협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한 몸부림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나라 진보정당의 역사는 잔혹한 형극의 연속이었다. 1950년대 후반 진보당 조봉암 당수가 자유당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후 진보정당은 1960년 4월 혁명을 계기로 재기하는 듯 하였지만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또다시 압살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진보정치의 싹을 송두리째 제거하고 모처럼 이루어지는 시도들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과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오랜 동안 눌려온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은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끊임없이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거, 1980년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1987년 여름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민중민주운동과 노동운동의 역량은 급성장하였고 완고하기 그지없던 반공주의의 벽을 무너뜨리고 사회변혁을 향한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특히 1996년말 노동법 날치기 처리에 항의한 전국적 총파업 이후 권력과 자본의 공세가 가중되고 노동운동의 역량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진보정당 건설은 더 이상 미룰수 없는 개혁과제로 되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이 일하는 자의 양보와 희생을 한없이 요구하고 전체의 60%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비롯하여 실업과 고용불안의 위협이 상존하는 현재 국면에서 진보정당의 진출은 더 없이 중요한 국면전환의 계기로 떠올라 있는것이다.

당내 단결을 공고히 함으로써 분열 우려 불식하고 진보정당 정체성 확실히 세워야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노동조합 운동의 위상과 역할,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당의 의회진출과 노동조합을 축으로 한 사회세력화가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



민주노동당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이제 민주노동당은 재야 투쟁세력에서 ‘의회’라는 합법적인 새로운 활동공간에 진입한다. 거기에는 여전히 냉전 수구세력과 개혁을 가장한 보수세력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벌써부터 전경련이나 경총은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이 노동자 투쟁을 격화시킬 것이라는 강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표출시키고 있다. 그런 한편에는 절박한 수많은 요구를 지니고 그 해결을 촉구하는 광범한 대중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당 의원 몇 명이 국회에 들어간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법과 제도가 바뀌고 노동상황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강점을 살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다른 정당의 민주화와 정책 정당으로의 탈바꿈을 촉진해 낼 수 있다. 의회운영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일구어낼 가능성도 높다. 무엇보다 가진 자, 누르는 자 중심의 입법이나 정책을 못가진 자, 눌린 자의 처지에서 참되고 균형잡힌 민주주의 실천의 방향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동당 나름대로 의회운영에 대응하는 전략과 전술을 마련해야겠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있어서 의회진출이 갖는 성격과 의미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공유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당내 단결을 공고히 함으로써 역사적으로 규정되어온 분열의 우려를 불식하고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확실히 세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것이 노동조합 운동의 위상과 역할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당의 의회진출과 사회세력화가 병행되어야 하고 사회세력화의 중심축은 노동조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동조합운동의 투쟁전략과 전술, 진보정당과 노동조합과의 관계 설정은 무엇보다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또한 흩어져 있는 개혁 진보세력을 끌어모아 일하는 자의 총단결과 통일의 폭을 키우는 일도 노동조합운동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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