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사태 이후 한국 기업들의 경영 시야(time horizon)가 단기화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됐다. 그 여파는 전 방위적이다. 하지만 노동시장만큼 두드러진 분야도 드물다.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걸림돌로 떠오른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속한 증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제조업 고령화와 청년실업 문제는 경영 시야의 단기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제조업 고령화 현상과 청년 실업은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 대기업의 신규 채용 감소만이 아니라, 신규 채용을 하더라도 신규 졸업자보다 경력자 채용 경향이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신규 졸업자에 대한 인적 자본 투자를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300인 이상 대기업의 청년층(15~29살) 일자리는 2001년까지 5년 동안 19만5천개 줄었다. 아울러 30대 대기업과 공기업, 금융산업의 신규 채용에서 신규 졸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97년 60.7%에서 2002년 18.2%로 감소했다. 경기순환에 관계없이 기업들은 신규 졸업자 대신에 경력자를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제조업 고령화, 젊은층은 비정규직

이런 경력자 위주의 채용은 제조업 고령화로 나타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3월31일 발표한 보고서 ‘고령화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과 대응전략’에서, 전통 제조업(조선, 신발, 철강, 섬유, 고무, 자동차, 석유정제, 기계, 화학) 노동자의 평균 연령이 2002년 38~41살로 10년 전과 견줘 3~6살 높아졌다고 밝혔다. 의류와 고무,플라스틱, 조선 산업은 같은 기간 동안 5~6살이나 늘었고, 기계,자동차,석유정제, 반도체,통신장비, 컴퓨터,사무기기, 금융 업종의 경우 이보다 낮은 2.0~2.6살 증가했다. 2000년 전통 제조업 평균연령이 37~39살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불과 2년 사이에 평균 연령이 1~2살 늘어날 정도로 최근 들어 고령화 현상이 빨라지고 있다는 우려의 말도 덧붙였다.

이 보고서는 상용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직종별, 학력별, 임금 계층별 등의 다양한 속성별 임금, 노동시간 등에 관한 통계를 제공하는 노동부 ‘임금구조기본통계조사’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조사는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통계를 포함한다. 자동차업종의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연령은 정규직에 비해 10살 정도 낮은 게 보통이다. 기업들이 정규직을 기피하고 비정규직을 늘려온 사정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비정규직의 평균 연령이 정규직 고령화를 상쇄한다. 하지만 제조업 평균 연령은 전반적으로 상승한다. 경력자 위주로 이뤄지는 기업의 신규 채용이 주요 원인이다.

경력주의 채용관행, 장기발전 저해

경력자 위주의 채용 관행에 대한 우려는 재계 연구소에서도 나오고 있다. 엘지경제연구원은 지난 4월8일 ‘비용 위주의 채용관행에서 벗어나라’란 보고서를 발표했다. 신입사원 교육비 절감 등 단기적 목적 때문에 기업들이 앞다퉈 시행해온 경력자 위주 채용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경력사원의 회사에 대한 충성도는 낮고, 높은 현금 보상과 빠른 승진의 대상이 되기 쉬운 경력사원으로 인해 기존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이탈이 심화될 위험성이 높다고 한다. 경력사원이 조건과 연봉에 따라 떠도는 철새로 기업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분석도 덧붙이고 있다.

이 보고서는 콜센터나 물류, 유통업체의 매장 관리 등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채용하는 관행에도 심각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회사의 서비스 이미지와 직접 연결되어 충성도가 높은 고객을 만들어 내는 업무”에서 일을 하는데, 비정규직이나 아웃소싱 된 직원들은 정규직 사원보다 주인의식이 약하기 마련이어서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도 제대로 배우라

보고서는 “기업에 딱 맞는 사람은 어디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고 충고하며 일부 미국 기업들을 예로 든다. 전문 유통업체인 ‘멘스 웨어하우스’의 경우 매장 직원들을 최대한 정규직으로 뽑고 사내 대학에서 상시교육을 시키는가 하면, ‘스타벅스’는 종업원을 브랜드의 전달자로 간주해 마케팅 비용을 이들에게 투자하고 임시직과 비정규직 사원에게 의료보험 혜택, 나아가 스톡옵션까지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75%나 됐던 스타벅스의 이직률은 65%까지 낮아졌다고 한다. 부족한 감은 있지만 스타벅스의 이런 모습은 시도 때도 없이 노동시장 유연성 타령만 되풀이하며 미국식 자본주의의 겉모습만을 흉내내기에 바쁜 한국 기업들보다는 월등히 낫다.

국내 대기업들의 왜곡된 ‘미국식 자본주의’ 흉내내기는 결국 민주노동당이 ‘청년의무고용제’를 공약으로 내걸게 만들었다. 물론, 기업 규모에 따라 신규채용 인원의 1~3%를 청년(15~29살)으로 채용하게 하자는 이 제도가 청년실업을 크게 줄일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식이다. ‘강성 노조가 청년실업을 낳는다’는 천박한 비난을 넘어서, 인적자본 투자를 기피하는 만연된 풍토를 견제하면서 사회적 해결책을 찾자는 게 그것이다.

조준상 전국언론노조 교육국장 (cjsang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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