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국회의원 선거 투표날이 열흘 정도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는 16대 총선과 많이 달라졌다. 먼저 국회의원 수가 299명으로(지역구 243명, 비례대표 56명) 26명 늘어났다. 15개의 정당 1,175명이 입후보하였고 그 가운데 여성후보가 65명인 점이 가장 눈에 띤다. 평균 나이는 50대로 크게 젊어졌고 공안사범 출신들이 대거 등록한 것도 큰 변화다. 선거분위기도 색다르다. 선거법이 엄격해져 돈뿌리기가 힘들어졌고 대규모 청중을 동원한 유세도 없어졌다. 길거리에는 후보들의 애걸이 간절하지만 유권자의 무관심을 깨기에는 아직은 이른 듯하다.

그런 속에서도 선거판은 양대 정당의 ‘탄핵심판’과 ‘여당견제’의 대치양상으로 내닫고 있다. 여당은 제멋대로 대통령을 탄핵한 야당을 심판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거대야당’인 한나라당은 ‘예상되는 거대 여당’을 견제해야 한다고 몰아친다. 그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사상 최초의 의회 입성이라는 ‘희망봉’ 정복을 눈앞에 둔 진보세력만이 정책대결을 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뿐이다.

구시대 망령과 무임승객의 흰소리들

선거에 이기기 위해 온갖 꾀를 부리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작태는 때로는 쓴웃음을 짓게 하는가 하면 때로는 한심스럽기 그지 없다. 번듯한 당사를 떠나 천막을 치고 허름한 건물을 찾아 옮기고도 당사 앞에 즐비한 외제, 고급승용차를 감추지 못해 허둥대는 모습은 3류 코미디에나 나옴직한 그림이다.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는 기존 정당 모두 공통적이다. 열린우리당은 탄핵에 반대하는 국민적 분노에 편승하여 전국적으로 지지도가 급상승하자 기고만장이었다. 탄핵에 반대한다며 선언한 의원직 총사퇴를 슬그머니 거두어 들이더니 잡탕 공천으로 스스로 내건 ‘양심 건국’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거대 여당에의 부푼 자만심은 정동영 대표의 노인풍이라는 망발로 연결되었다. 그야말로 손님 실수로 굴러들어온 행운에 젖다보니 민심을 가볍게 보아왔던 평소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한때 지역당 지키기도 위험해보이던 한나라당은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대표로 내세워 급속도로 지지세를 회복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박정희의 후예답게 그에 대한 환각제에 지역감정을 버무려 톡톡히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속죄 한마디 없이 그녀를 광주에 보내 당당한(?) 모습으로 민주묘역을 참배하게 하는 대담무쌍함까지 보였다.

광주가 어떤 곳인가.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받고 그 후계자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한 곳이다. 한나라당의 오만함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형근, 김기춘, 김용갑 같은 냉전 수구의 첨병들을 앞세워 놓고 개혁공천이라고 강변하고 과거 거대여당 때나 최근의 거대야당의 횡포에 대해서는 한마디 반성도 없이 거대여당을 견제하기 위해 자기들을 지지해달라고 아우성이다.

한나라당은 냉전 수구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그들에게는 진보세력과의 경쟁을 인정하는 보수주의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기득권에 집착하는 추한 작태가 있을 뿐이다. 자칫 소멸 위기까지 감지되던 민주당은 추미애 의원의 얼굴을 내세워 동정을 애걸하고 있다. 광주에 내려가 삼보일배로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처절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역시 지역감정에 매달려 당을 살리려 한다는 점에서 낡은 시대의 유산에 억매어 있을 뿐이다.

사라져야 할 반민주 유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행태는 탄핵사태를 계기로 패퇴의 위기에 몰린 수구세력들이 지역감정을 되살려 목숨을 연장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특히 한나라당을 주축으로 하는 수구세력의 초조함은 군사쿠데타론으로 돌출하기도 한다.

이들은 탄핵반대운동을 ‘혁명세력의 배후조종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규정하고 “한국적 좌익혁명의 통과의례적 축제행사에 의해 구축될 좌익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복원하는 데에는 군부쿠데타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섬뜩한 일이지만 골통 수구의 염원은 이처럼 끈질기고 잔혹하다.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행태는 민주화의 성과물로 출현했다는 참여정부에 의해서도 저질러지고 있다. 현 정부의 한계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 이라크 파병, 부안사태, FTA체결, 노동 유연화 등에서 이미 드러나 있지만 이번 선거과정에서 ‘법대로’를 내세워 노동운동을 규제하려 하는데서도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전교조 위원장을 입건하였고 공무원노조 부위원장을 구속하였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다. 대학교수는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면서 초중고 교사들에게는 이를 금지하는 불평등, 같은 국민이면서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자유를 속박받아야 하는 모순을 참여정부는 ‘법치’의 잣대로만 처리한 것이다. 박정희 향수나 호남의 의리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회생할 수 없을 만큼 낡은 세력의 기반은 급격히 허물어지고 있지만 그 자리에 가식적인 민주화의 논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똑바로 보아야 할 일이다.

반민주의 유제는 공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선거에서의 정책제시는 정당의 당연한 의무이자 유권자가 지녀야 할 선택과 결단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누구도 당의 정책을 눈여겨 보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언제나 그러듯 선거때 발표된 각당의 공약은 온통 장밋빛 일색이다. 복지와 정의, 자유와 평등이 충만한 이상향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선거가 끝나면 곧 휴지통에 박혀 버릴 것이다. 그들에게는 차별성이 별로 없다. 오로지 선성장 후분배의 철학과 경쟁력 우선의 시장주의로 채색된 신자유주의 정책기조가 순서와 형용사를 달리하면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정책은 개별 후보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못된채 인물론이 득세를 하게 되고 결국은 명망가가 투표의 기준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정책은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의 것이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지만 지역감정과 탄핵역풍을 무력화하기에는 힘이 부쳐 보인다.

참된 민주주의의 전진을 위하여

세상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을 통해 발전한다고 한다. 이것은 눌린 자가 일어서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수구세력의 쇠락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만큼 이 나라 민주주의가 진전되어 온 결과다. 하지만 지역감정과 왜곡된 역사의식을 악용하여 기득권을 되살리려는 음모 역시 치열하다. 냉전 수구 기득권층의 뿌리가 아직도 깊고 넓게 뻗어있다는 증좌다. 다른 한편에서는 집권세력은 자유주의 보수진영의 속성을 개혁으로 포장하고 탄핵심판과 사표심리를 최대한 이용하여 의회지배를 노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총선거는 진보세력이 절차상 민주주의마저 왜곡시키려 드는 수구, 보수세력과 맞서는 결전의 장이자 실질적 민주주의의 전진을 위한 투쟁의 출발점이다. 그 만큼 일하는 사람들은 진보정당에 더 많이 힘을 실어야 하고 진보정당은 더 많은 대중을 끌어안기 위해 더욱 힘을 내 뛰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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