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지난 68년 김신조가 이끄는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사살’을 위해 순식간에 청와대 코앞까지 잠입한 사태가 벌어졌다. 경악한 중앙정보부는 극비리에 ‘김일성 목 따기’를 계획, 31명으로 구성된 이른바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긴장관계를 원치 않던 미국의 압력으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이 부대를 만든 이들은 실미도 부대를 애초 ‘존재하지 않는 부대’로 만들기 위해 ‘전원몰살’ 계획을 세웠다.

장면2. 2002년 4월, 우리은행은 공과금 수납 업무 등 후선업무(영업시간 외 업무)를 본부가 통합, 처리하기 위해 BPR(후선업무)센터 설립을 추진한다. 이 업무가 영업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3개월짜리 전담계약직 사무행원 126명도 채용했다. 그해 8~9월 한 달 간 전국 점포의 고지서를 취합하는 시험 운영을 실시했다. 하지만 시간과 비용 때문에 현실중앙센터에서 총괄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계획은 수정됐다. 공과금 업무를 BPR센터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을 폐기하고 각 지점에 설치된 공과금 납부기계를 통해 처리하기로 했다. 126명의 사무행원들은 자동납부 기계를 관리하고 영수증 처리를 담당하는 업무를 각 지점에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은행 인사팀은 지난달 2월26일까지 남아있는 사무행원 57명에 대해 3월31일자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장면1은 누구나 짐작하듯 영화 <실미도>. 다음은 대부분 사람들이 잘 몰랐을 우리은행 사무행원들에 대한 이야기다. 신기하게도 공통점이 많다. 군사정권은 북한에 대해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비상식적인 ‘김일성 목 따기’ 계획을 세워 31명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럼 우리은행은 어떨까. 이 은행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실효성을 검증해 보지도 않은 체 BPR센터를 설립해 계획이 무산되자 뽑은 직원들을 각 영업점포로 돌리다 결국 57명 전원을 해고하고 말았다. 영화 <실미도>가 비정규직 700만 명 시대에 <우리은행 판 실미도>로 재연된 느낌이다.

공과금 통합관리센터 백지화, 57명 해고

우리은행 사무행원 심 아무개씨는 말한다. “우리가 받은 설움은 그야말로 이중적이었다. 비정규직이기에 저임금과 고용불안은 말할 것도 없고 본부 소속이면서 각 영업지점에 배치됐다. 지점 직원들과의 소외감은 더욱 참기 힘들었다. 때문에 초반 120명이 넘던 사무행원이 모두 중도에 그만두고 최종적으로 우리 57명만 남게 됐는데 그 인원마저 한꺼번에 해고한다고 나선 것이다.”

또 다른 사무행원 권 아무개씨의 말. “지난 1년6개월 동안 은행이 계약해지를 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3개월 계약갱신기간 때마다 날아든 재계약서에는 ‘계약을 원치 않으면 나오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계약서를 보면 인간적인 모멸감마저 든다. 또 출산휴가를 갔다 3개월 계약갱신 기간 안에 복귀를 못하면 자연히 계약이 해지된다. 그렇게 자진퇴사 아닌 퇴사로 나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은행 관계자의 주장은 이렇다. “계약직 사무행원은 BPR센터에서 고지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무산돼 상시적인 고용인원으로 보기 힘든 것이다. 그래도 일단 은행에서 채용한 인원이라 도의적인 측면에서 지점에서 수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공과금 수납 업무라는 것이 한 달 3~4일만 바쁠 뿐이고 통장납부기계가 많이 정착 돼 일 자체가 줄어 더 이상 인력을 둘 필요가 없게 됐다”

그러나 사무행원들의 말은 다르다. “우리가 고지서 담당 업무만 하며 편히 있던 것도 아니다. 지점이 바쁘면 우리도 창구업무를 한다. 창구직원들도 바쁜 말일엔 공과금 수납을 한다. 며칠만 바쁘다는 것도 그렇다. 바쁜 날이 몰려 있는 것은 우리나 정규직이나 창구 계약직이나 다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금융권에서는 외환카드 사태여파로 은행 등 제1금융권에도 후폭풍이 예고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비정규직의 감원은 심각하다. 외환은행 사태에서도 정규직은 231명이 희망퇴직 대상이지만 계약직은 2,000명 정도가 이미 ‘소리 없이’ 희망퇴직 신청을 마친 상태다. 외환카드 뿐 아니라 작년 한해 삼성카드는 1,870명, LG카드에서는 4,900명이 감원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어쩌면 3개월짜리 계약직 여성노동자 57명의 해고정도야 큰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우리은행 계약직 사무행원들처럼 약한 비정규직, 그것도 여성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대상이 된다. 그런데 보호해줄 법적 근거도, 힘 있는 조직도 없어 이들의 생존권을 외면하는 현실은 비정규직을 ‘두 번 죽이고’ 있다.

김경란 기자 eggs95@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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