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부터 이틀 동안 싱가포르에서 열린 세계적 화학기업 바스프(BASF)의 아시아태평양지역 노조 네트워크 3차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윤효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국제담당이 아래 글을 보내왔다. 국제노동단체와 각국 노조 대표들로 구성된 이 회의에 본사 보쉐라우 부회장이 직접 참석했다는 점과 노,사 모두 ‘종업원 참여’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가 바스프의 국제 경쟁력과 직결돼 있음을 공유했다는 점이 눈에 띤다. <편집자주>



독일에 본사를 둔 세계적 화학 기업인 바스프(BASF)의 아시아태평양지역 노조 네트워크 회의가 2월9일과 10일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아태 지역에서의 바스프 노조 네트워크 회의는 이번이 세 번째로, 첫 모임은 2000년 10월 광주에서 열렸으며, 필자는 첫 모임부터 통역을 겸해 참가하고 있다.

국제화학노련(ICEM), 독일화학노조(IGBCE), 에버트재단(FES)의 도움을 받아 개최된 이번 회의에는 아시아 각국의 현지 노조를 대표해서 한국 바스프 여수공장의 김현열 노조위원장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인디아, 말레이시아, 일본, 싱가포르의 바스프노조 간부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독일 쪽에서는 바스프 독일 본사 종업원평의회 의장과 IGBCE 간부, 그리고 사측을 대표해 본사 부회장과 인사담당 이사가 참가했다.
독일 기업이 대부분 그렇듯 바스프 역시 종업원평의회를 두고 있다. 십 년 전에 유럽 차원의 바스프 종업원평의회가 만들어졌는데, 남미와 아시아에는 종업원평의회라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노조 네트워크라는 틀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첫 모임에는 독일 본사의 종업원평의회와 독일화학노조 간부, 그리고 아시아 현지 바스프 공장의 노조 대표들만 참석했는데, 이번에는 독일 본사의 부회장과 인사담당 이사도 참가하는 등 노조 네트워크 회의에 대한 경영진의 관심이 점차 높아지는 분위기다.

공통의 도전들, 인원감축,외주화,반노조 의식

회의는 2부로 나눠 진행되었다. 1부는 노조 대표자들끼리 모여 현지 공장의 노사관계 상황, 산업안전보건 문제, RC(Responsible Care) 활동 현황 등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2부는 노사 간담회로 독일 본사에서 날아온 보쉐라우 본사 부회장과 한스 인사담당 이사의 발표를 듣고 노조 대표자들이 토론을 벌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아태지역 바스프 공장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비슷했다. 상대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노사관계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안정되어 있었지만, 일방적 인원감축, 비정규직 확대, 경영진의 반노조 의식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말레이시아 콴탄 공장의 경우 작년까지 사측이 노조를 인정하지 않아 제대로 된 교섭이 이뤄지지 못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사측이 생산라인을 일방적으로 폐쇄해 70명의 일자리가 없어졌고, 한국의 울산공장 역시 인원감축이 예정되어 있다.

실업 문제는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업자 500만 시대에 진입한 지 오래되었고, 이러한 노동시장 상황을 반영하여 본사의 인력도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왔다. 특히 참가자 모두 본사의 대(對)중국 투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바스프 상하이공장 노조위원장은 비자 문제로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2005년 난징에 세워질 아시아 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에 따라 본사의 투자 전략이 요동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준과 내용에서 차이는 있었지만, 각국의 바스프 노동자들이 부딪힌 도전은 공통된 게 많았다.
이번 회의에서 RC, 즉 세계 화학업계가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국제 캠페인인 ‘책임 있는 보호(Responsible Care)’를 둘러싸고 약간의 논란이 일었다. RC란 노사정 3자의 자발적 협력 하에 추진되는 보건?안전?환경을 개선하려는 국제 캠페인인데, 이를 참가 노조 대표들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거나, 알아도 현지 사업장 차원의 경영 전략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국제화학공업협회(ICCA)의 권고를 받아 RC를 승인한 바스프 본사의 지침에 따라 현지 공장 곳곳에 RC 관련 홍보물을 부착해 놓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홍보하고 교육하는 데가 별로 없음이 드러난 것이다.

인사정책, “노동권,환경권 보장한 국제협약 정신과 일치”

이번 회의와 관련하여 주최 측이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 사건은 한스 인사담당 이사와 보쉐라우 본사 부회장의 참석이었다.

한스 이사는 “바스프 그룹 노사관계 정책의 목표는 국제노동기준 준수, 종업원과의 사회적 대화 촉진, 산업안전보건의 책임성 강화, 환경적 가치의 존중이며, 이를 위해서는 노사간의 상호 인정과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면서 바스프는 “인권,노동권,환경권과 관련된 주요 국제 기준인 ILO 기준,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그리고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주도하는 유엔 세계협약(Global Compact)의 정신을 승인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보쉐라우 부회장은 다국적기업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상대를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되며, 같이 일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향후 십 년 간 일자리와 기술 이동이 급속히 이뤄질 것이며, 노사 모두가 부딪힌 최대의 도전은 일자리와 기술의 균형, 산업과 생태계의 균형, 선진국과 후진국의 균형, 다른 문명권간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이냐에 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지금 노사정 3자 모두 에너지 부족, IT 기술의 비약적 발전, 자유로운 생산품 흐름, 이기주의, 유엔의 약화, 규제 철폐라는 전혀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노사 공동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인권과 노동권 보장을 규정한 본사의 지침이 현지 공장에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인도네시아 노조 대표의 지적에 대해 그는 “각국의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해결할 문제가 많으며, 여러분 나라의 지배계급이 결정하는 것까지 바스프가 해결할 순 없다”면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일만 갖고 다국적기업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러분이 힘이 있다면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국제노동단체와 노사 양측의 참가자들은 ‘종업원 참여’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가 바스프의 국제 경쟁력과 직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공유하면서 회의를 마쳤다.

이번 바스프 회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현지 공장 노조 대표들과의 만남을 위해 시간을 내어 달려와 경영 전략과 사측의 고민을 직접 이야기하는 최고경영진, ILO 기준을 비롯한 각종 국제 규정을 자기 기업의 노사관계 정책 목표와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본사의 인사 책임자, 자기 노조나 종업원평의회 일로도 벅차다고 발뺌할 수 있을 텐데 시간과 재정을 마련해 그룹 차원의 국제적 노조 네트워크를 꾸리려 노력하는 독일 본사의 노동자 대표들, 이를 지원하기 위해 ICEM 등 관련 국제노동단체와 협력하는 노조 상급단체 등…. 한국의 노사관계나 노동운동 풍토와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도 다국적기업이 많다. 특히 현대, 대우, 엘지 등 노조운동이 활발한 곳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런 네트워크 회의를 조직하고 최고 경영진을 불러낼 수 있을까. 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 회사가 진출한 현지 공장의 노동자 실태에 대한 기본 조사라도 하고 있기나 한가.

이윤추구가 기업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한국 기업인들에게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이 고민하는 ‘사회적 대화’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정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귀국 길에 올랐다.

윤효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국제담당
yoon@kls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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