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쉼’일 테다. ‘재충전’이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기회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노동계에서 ‘안식년 휴가제’가 도입, 업무와 일상사 구분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노동운동가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민주노총은 6년 이상 근무자에 6개월의 안식년 휴가를 주고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1번에 1~2명이 휴가를 쓰도록 하고 있다. 공공연맹은 7년 근속에 6개월, 보건의료노조는 10년 근무에 한달, 사무금융연맹은 6년에 6개월 등 안식년 휴가를 준다. 최근 달콤한 휴가를 보내고 업무에 복귀한 이근원 공공연맹 정치통일국장이 안식년 휴가와 관련, 아래 글을 보내왔다.

이근원 공공연맹 정치통일국장

“연맹 좋네… 우리는 현장에서 죽도록 일해도 그런 게 없는데…”

장기근속휴가를 끝내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은 전직 노조간부가 다소 비꼬면서 한 말이다. 사실 민주노총에서 장기근속휴가를 만들려고 했을 때도 그와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현장에서 수십년을 일해도 휴가란 게 변변히 없는 데 상급단체에서 그런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민주노총과 몇몇 연맹에서 장기근속휴가를 실시하고 있다.

나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의 휴가를 보냈다. 괜히 휴가에 들어간 게 미안해서 한달이 지나서야 연맹 홈페이지에 ‘돌아봄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쉬고 있다는 글을 올릴 수 있었다.

솔직히 지난 93년에 연맹이라는 곳에 처음 들어오면서 내심 최소 5년은 버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학생운동, 위장취업, 소위 지하운동까지 해 본 터라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매너리즘’이라는 고질적인 병이 생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계속 투쟁만 하다보니 사람마저 매사에 투쟁적으로 달라짐을 느끼기도 했다. 인생에서 제일 힘든 것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그 속에 빠지지 않고, 새로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에 치어 방향을 잡는 대신 주어지는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해야 했다.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대안을 모색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해서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는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잡지를 보다가 ‘월급 타먹으러 다니는 생계형 활동가’라는 단어를 보고 섬뜩했을까? 생계형 활동가라고 해도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갓 입사한 조카보다 월급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휴가와 함께 제일 먼저 한 일은 휴대폰을 정지시킨 일이었다. 바쁘게만 돌아가는 일상을 접고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낚시도 다니고, 아이들과도 오랜만에 친해질 수 있었다. 집사람과 영화도 보고, 동네 아줌마들과 술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갔다.
가족들과 여행도 다녀오고, 혼자 베트남 배낭여행도 갔다 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다시 돌아 볼 수도 있었고, 집안 일이 가지는 분주함과 가사노동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노동운동의 가치와 잣대만으로 세상을 보던 태도에서 한 발 떨어져 내가 사는 세계의 다양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감옥이 아닌 집에서 그만큼의 여유를 가져 본 것은 처음이었다.

노동조합 상근자들의 일상은 불규칙하다. 격주휴무를 실시하지만 집회가 주말에 집중되면 형식적으로 되고 만다. 파업투쟁이나 분신과 같은 큰 사안이 발생하면 거의 집에 못 들어간다.
수많은 투쟁들이 벌어지고, 시도 때도 없이 거리 농성과 투쟁이 전개된다. 워낙 노동강도가 강해 스스로 3D업종으로 부르듯 새로운 사람을 뽑을 때면 몇 번이고 재모집을 해야 한다. 거기에다 정권의 탄압으로 때때로 구속과 수배를 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죽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해당 조직에서 ‘사람에 대한 투자’는 거의 없었다. 철저한 자기 강제와 투자로 스스로 새로움을 만들어가야만 한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노동운동은 10여년 동안 많이 발전해 왔다. 동시에 많은 한계와 과제를 안고 있다. 노동운동이 나갈 방향과 목표에 대해 일차적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연맹과 총연맹의 노동운동가들이다. 그들에게 ‘여유’를 주어야 한다.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질 줄’로 생각하는 일중독에 걸린 상근자들에게 한 발 떨어져서 고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사람의 쉼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는 상황에서 그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장과 비교할 때의 어려움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다시 돌아와 3달째에 접어든 연맹은 여전히 분주하다. 집에 늦게 들어가고, 술에 찌든 일상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전과 비교해 한결 편하다.

아이들과 집사람의 관계도 이전의 ‘포기’ 상태를 넘어서 부드럽다. 무엇보다 운동에 대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일에 치이고, 찌들어있지는 않다.

휴가가 끝나고 오니 사람들이 “이제 좋은 시절 다 끝났네”라고 말한다. 나는 대답한다. “그렇게 좋은 시간을 가진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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