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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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은 지난 16일 제31차 대의원대회를 열어 제4기 임원을 선출하였다. 대의원들은 이수호-이석행 후보 진영에 54.8%의 지지표를 던져 앞으로 3년간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 역할을 맡겼다.
부위원장 선거에서도 역시 같은 쪽인 강승규,신승철,김지예,이혜선 후보를 당선시켰다.
보름 넘는 치열한 득표전 속에서 눈터지는 계가 난전으로 점쳐졌지만 결과는 477 대 391이라는 큰 차이로 결말이 났다.
열띤 연설과 투표가 끝나 축하와 위로의 덕담이 오가고 이런저런 분석과 논평이 이어졌다. 희망과 주문과 고언 등이 섞여있지만 민주노총 운동기조의 변화에 대한 전망이 대부분이었다. 뒤늦게 재검표로 오길성 후보가 부위원장에 당선되는 새 기록(?)을 남기면서 일단 민주노총 임원선거는 막을 내렸다.

관성의 투쟁보다 현상타파를 선택한 배경

새로이 선출된 지도부는 선거 캐치프레이즈로 “우리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 “강한 민주노총! 승리하는 노동자! 책임지는 지도부”를 내세웠다. 그 근거로 이들은 민주노총의 침몰 ‘위기’를 들고 ‘조합원의 신뢰를 받는 조직, 현장 조합원을 투쟁의 주체로 세워 민중의 희망이 되는 조직으로’의 새 출발을 다짐하였다.
이를 위해 △전산업이 참가하는 준비된 총파업 △중층적, 총체적 교섭체제 수립 △사회공공성 강화 및 비정규직 철폐 △자주통일운동의 대중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저지와 분쇄에서 쟁취와 확보’로의 전환을 운동기조로 천명하였다.
그에 반해 경쟁후보인 유덕상-전재환 후보 진영은 신자유주의 총자본의 공세와 맞서기 위해서는 보다 더 ‘힘있는 민주노총’을 세워야 하며 기존의 투쟁전략을 더욱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바꿀 것은 민주노총의 투쟁노선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에 대한 타협주의라고 이들은 강조하였다.
요컨대 이번 선거에서 전자가 위기의 현상타파를 주장하였다면 후자는 투쟁우선의 현상유지전략으로 맞선 셈이었고 조직은 전자에 힘을 실어주었다. 민주노총 조직은 저항과 분쇄로 특징 지워지는 87년 체제를 마감하고 “우리가 먼저 혁신하면서 세상을 바꿔가는 대안을 제시하자”는데 동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이고 후보들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현장 분위기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후보들의 불꽃 튀는 논쟁과는 달리 현장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후보들은 너나없이 현장의 뼈아픈 소리, 쓰디쓴 비판을 많이 들었다고 고백하였다.
민주노총은 현장 노동자들과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애정과 신뢰보다는 불만과 불신의 대상으로 되어 있음을 후보들은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우려의 일단은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선거과정에서 홈페이지 접속건수가 1천만건이 넘었고 대의원대회 당일 생중계는 1만여명이 동시에 접속하여 시청하였다. 물론 이것은 민주노총에 대한 높은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저질의 음해성 주장으로 호기심을 자극한 내용도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민주노총에 가까이 가기보다는 멀리 놓고 보면서 때로는 마구 헤집어도 괜찮은 냉소의 대상으로 인식한 결과는 아닌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민주노총의 이번 선거는 이런 현장의 냉담과 냉소라는 흐름을 밑바닥에 감추면서 뜨겁게 진행됐던 것이다.

곳곳에 도사린 안팎의 걸림돌들

이수호 위원장 당선자는 “우리를 바꾸자”는 구호대로 “내부혁신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제도와 시스템을 개혁하는데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새 지도부의 혁신의지를 시험하려는 기도는 곳곳에 널려 있다.
조직 안에는 운동의 혁신을 거부하고 ‘힘’에 근거하여 투쟁주의로만 치닫고자 하는 이념적 갈래들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편향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투쟁성을 오랜 민주노조운동의 정통성으로 인식하고 있거나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새 지도부가 강조했던바 투쟁과 교섭의 효율적인 결합을 내용으로 하는 대중적 노동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예감케 하는 대목이다.

자본의 공세 역시 드세기만 하다. 이들은 보수언론을 통해 노조운동을 경제위기의 원흉으로 내몰면서 투쟁을 접고 노사협조에 나서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노사정위원회 참여도 그런 맥락에서 강조되고 있다.
보다 큰 변수는 노무현 정부와의 관계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생산성 향상 범위 내의 임금인상을 강조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지도자회의를 제안했다.
이를 배경으로 자본 쪽이 고용 없는 성장을 들이대면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임금자제, 무파업선언, 복지축소의 필요성을 강조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민주노총은 당연히 자본의 요구에 강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지만 일자리 창출이라는 시대적, 사회적 의제에 어떤 형태로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 밖에 구조조정의 지속과 고용불안, 날로 확대되는 사회적 양극화, 사회공공성의 후퇴 등도 쉽사리 밀칠 수 없는 사회개혁의 핵심과제이다.
시장경제주의로 경도된 정부정책에 대해 무슨 대안을 제시하고 어떤 수준에서 교섭과 투쟁을 벌여갈 것인지 거센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자기혁신은 민주노조의 제자리 찾기에서부터

87년 노동자 대항쟁으로부터 20년, 민주노총 창립으로부터 10년을 한 두 해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임기를 시작하는 새 지도부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선거경쟁과정에서 파인 갈등의 골을 메우고 단결과 화합의 장을 마련하는 일에서부터 공약을 실천하는 일, 조직안팎의 요구를 수렴하여 해결하는 일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장신뢰를 복원하고 제도를 개혁하는 일일 것이다. 선거기간에 두 후보 진영이 다같이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제도혁신을 약속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지만 운동 혁신의 출발점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현장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또한 제도혁신의 원칙과 방안은 어떤 것인가? 어찌 보면 한 뿌리의 이 해답은 이미 제기되어온 운동의 핵심 개혁과제를 과감히 해결하는데 있지만 이 일 역시 민주노총이 노동조합 본래의 모습에 충실할 때 힘 있게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대중조직이며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축이다. 그것은 일하는 자의 세상을 위해 눌린 자, 소외된 자들이 스스로 만든 조직이며 자주성,민주성,연대성에 기초한 단호한 대중투쟁을 그 생명력으로 한다.
그곳은 투쟁만을 위해 대중을 동원하여 호령하는 집단도, 일부 세력이 자신의 주의주장을 고집하여 독점할 수 있는 조직도 아니다. 그곳은 노동자들이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푸근하고 넉넉한 곳, 서로 즐거움과 아픔을 나누고 잘못은 안으로 감싸 안아 삭이는 곳,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모든 것을 같이 해결하려는 소탈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면서도 한번 결정되면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 몸으로 부딪혀 나가는 집단이다. 그곳에서는 소박하고 성실한 노동자적 품성이 모든 활동가의 근간이다. 또한 그곳은 대중 위에 군림하여 대중이 다가오기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중에게 다가가 그 속에서 답을 찾는 조직이다.
대중을 지도한다는 오만을 극복하고 대중에 봉사한다는 겸허한 자세로 일관하면서도 끊임없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조직이다.

어찌 보면 이들 기준은 진부하다고 해야 할 대중조직의 기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노조의 제자리를 찾기 위한 이런 노력들이 운동혁신의 출발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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