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지식인들의 사회참여를 ‘앙가주망’이라 부른다.

중앙일보는 지난 12월31일 런던 특파원의 칼럼을 통해 이문열과 황석영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으로 거론된 사실을 기사화하면서 “(우리 정치에도) 21세기형 앙가주망이 기대된다”고 썼다.
이문열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이 됐지만 황석영은 사의를 표했고 대신 소설가 김주영씨가 열린우리당의 심사위원이 됐다.

이 칼럼은 “60년대 김수영과 7,80년대 김지하, 고은 등의 참여문학이 최근엔 문학판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중앙일보는 그런 가운데 이뤄진 이번 소설가들의 정당 참여에 대해 주목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중앙일보가 읊조린 사람들은 최근 문학판에서 중앙일보의 말대로 확실히 주류가 됐다. 그러나 그들이 60~80년대에 추구했던 문학정신은 여전히 비주류다.
결국 사람이 변한 것이다. 70년대의 저항문학도가 정당에 참여하면 무조건 ‘앙가주망’이란 등식은 기계적인 결합일 뿐이다. 그들이 과거의 저항정신을 온전히 유지한 채 현실정치에 뛰어들어야 앙가주망이지, 주류 정치판의 정치인들보다 더 심한 악취를 풍길 만큼 현실적인 ‘책장사’로 추락한 이상, 그런 지식인이 아무리 많이 정치에 참여한들 그것을 ‘앙가주망’이라고 부를 순 없다.
다만 책장사의 정신으로 ‘표장사’에 들러리 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황석영은 좀 그렇다 치더라도 이문열의 정당참여를 저항문학이나 참여문학의 앙가주망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문열은 사르트르만큼 책을 많이 판 것은 사실이지만 사르트르만큼 시대정신에 충실한 참여문학을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문열은 앙가주망의 대표주자인 에밀 졸라처럼 ‘나는 고발한다’는 글로 필화를 겪은 적도 없다.

최근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소설가들의 영입은 앙가주망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품성을 높이려는 삼류 정치권과 책장사들이 손뼉을 마주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손뼉 치기는 이미 우리 언론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소설가 조경란씨는 지난해 12월31일 동아일보 7면 ‘올 한해 너무 길었다’는 원고지 10매도 안되는 칼럼에서 지난해 자기가 쓴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악어 제이크’를 자그마치 7번이나 새겨 넣었다.
이 칼럼은 그 제목만큼이나 고단했던 우리 국민들의 삶은 단 한 줄도 안 나오고 오로지 자기 글쓰기 작업의 어려움과 책 선전에만 열을 올리다가 끝난다.
서강대 장영희 교수도 지난 10일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부안 군민들의 시위방식을 비난했다.

또 외국인 친구의 입을 빌어 ‘한국은 시위의 천국’이라는 식으로 시위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장 교수의 칼럼은 대부분 미국을 소재로 한다. 지난해 7월19일 같은 중앙일보 칼럼에서 장 교수는 “LA공항에서 밖으로 나오자 미국 특유의 공기 냄새가 났다. ~조금은 흥분되고 또 조금은 붕 뜬 느낌…”이라고 했다. 장 교수님, 한국에도 ‘공기 냄새’는 있습니다.

연세대 민선주 교수도 조선일보 지난해 12월31일자 칼럼에서 미국 유학 갔던 한국 청소년들이 방학을 맞아 엄마와 함께 귀국하는 비행기 안 풍경을 다루면서 한국 청소년들의 새치기와 밥투정 등 버릇없음을 비판했다. 부모 잘 만나 도피유학 갔다 오는 한국 아이들이 버릇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민 교수는 이 아이들을 한국 청소년들의 대표로 규정해, 한국의 청소년들은 모두 버릇없고 미국 아이들은 예의바르다고 기술했다. 그렇게 예의바른 미국 아이들이 커서는 미사일로 남의 나라 국민 수만명을 집단사살 하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서울대 장소원 교수도 동아일보 12월31일자 칼럼을 통해 한국의 카드사 문제를 다루면서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교수 신분증을 제시해도 카드를 발급해주지 않는데 우리는 길거리에서 돈까지 줘 가며 신용카드를 마구 발급해 준다”며 한국을 비난했다. 장 교수의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런데 왜 하나같이 소재가 미국이냐는 거다. 나는 반미주의자도 아니지만 지식인들이 신문 지면에 칼럼을 통해 쏟아내는 미국 얘기에 질렸다.
미국 얘기가 아니면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는 반쪽짜리 지식인 말고, 한국 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앙가주망’ 칼럼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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