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기 세종문화회관노조 서울시극단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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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9월6일 오전 11시45분 마흔 하나의 나이로 서울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돌보는 이 하나 없이 이중섭은 숨을 거뒀다.
보호자가 없었던 탓에 연고자를 찾는 신문공고가 나갔지만 사흘 동안이나 아무도 찾질 않았다. 우연히 친구 김병기씨가 죽은 사실을 모른 채 병원에 들렀다가 이 사실을 알고는 사람들에게 알렸고 순식간에 100여 명의 친구들이 모여들자 이에 놀란 병원 관계자는 '이렇게 유명한 분이 왜 그토록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가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천재 화가 혹은 확고한 민족주의 화가 혹은 근대회화의 선구자라 일컫는 그의 죽음은 이러했다.

따뜻한 영혼을 가진 천재 화가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너무 유심히 관찰한 나머지 소 주인으로부터 소도둑으로 오인받기도 했다는 일화는 그것을 증명한다.
그는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비록 서구적인 재료로 그림을 그릴망정 그것을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한 개성적이고 향토적인 작가였다. 결코 모방하려 하지 않았고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화폭에 옮기고자 노력한 진솔한 인간이기도 했다.

또한 이중섭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는 작가였다. 그림의 소재와 재료 모두를 삶의 흔적에서 찾고자 노력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제주도에서 피난생활을 할 당시에는 너무도 먹을 것이 없어 해변에 나가 게나 조개 등으로 연명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중섭은 살아있는 생명을 이처럼 잡아들인다는 게 미안하다고 하며 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산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까마귀와 달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림의 재료 역시 마찬가지다. 궁핍한 생활로 종이를 살 수 없게 되자 담뱃갑 속의 은박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은지화이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그가 죽기 전인 1955년에 뉴욕의 근대미술관 MOMA에서 영구 소장품으로 결정됐다.
가식을 싫어하고 동심의 세계를 지향하려 했던 순결한 화가 이중섭, ‘눈이 고와서 황소와 아이들을 사랑한다’던 따스한 사람 이중섭.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를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는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세상은 언제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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