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늦은 밤 불 꺼진 빈 교실에서 비합 문학써클 멤버들과 소주를 꼴짝이며 시를 읽다가 들키기도 했다. 학교 근처 건물 화장실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원초적 본능>을 보기위해 극장입구를 통과했을 때의 스릴은 아직도 짜릿하다.
<어린왕자>의 여우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 유명한 문구를 이용해 연애편지를 썼고, 해마다 내 모든 비밀을 털어놓아도 좋을 죽고 못 사는 친구가 한 명쯤은 생기기도 했다. 90년대 초반을 겪던 내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다.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1978년 한 남자고등학교를 무대로 ‘학원액숀로망 무비’를 표방하고 나섰다.
물론 이 영화의 액션씬은 정말 볼만하다. 그동안 조직폭력배가 등장한 영화에서 ‘합’을 맞춘 잘 짜여진 격투장면은 정말 질리도록 봐 왔던 터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마구 몰려들어 두들겨 패면 장땡인 고등학교 아이들의 ‘막싸움 액션’은 신선하고 풋풋하면서도 박진감까지 있다.
역시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판타지 액션물인 <화산고>가 특수효과를 동반한 SF무협영화 스타일로 연출한 액션씬도 나름대로 훌륭했지만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를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유하 감독이 전직 시인이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난 아무리 봐도 이 영화가 광고문구대로 ‘1978년, 우리들의 학원액숀로망 무비’가 아니라 유신독재 시절 전체주의가 온 나라를 집어삼킨 폭력의 시대에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남자아이들의 ‘성장영화’같다.



강남땅이 오를 것이라는 어머니의 성화로 말죽거리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전학 온 현수(권상우 분). 그런데 이 학교는 학생들 간의 ‘짱’자리를 둔 세력다툼이 치열하다. 학교 옥상은 권력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피를 흘리는 혈전의 장소다.
학생 뿐 아니다. 우열반을 나누어 놓고 수업을 하는 선생은 열반 학생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학생들의 폭력을 선생들은 다시 무자비한 폭력으로 응징하고 그것도 부모의 능력에 따라 차별적으로 행해진다.

모범생이며 내성적인 현수는 학교 ‘짱’이자 남자답고 치기어린 정의감마저 있으며 반항적이고 잘생기기까지 한 우식(이정진 분)과 친구가 된다.
90년대 서태지처럼 그 시절 아이콘이었던 이소룡에 대한 경외심을 공유하면서 더욱 가까워진 아주 다른 이 두 친구는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여학생 은주(한가인 분)를 동시에 사랑하면서 갈등이 생긴다.
학교에서 세력다툼에 밀린 우식이 은주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자 소심하던 현수는 복수를 꿈꾸며 무시무시한 괴력을 연마해 이소룡의 쌍절곤을 휘두르며 학교 옥상을 평정한다. 그리고 말한다.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
우식은 아이들의 폭력에 시달리는 전학생 현수에게 다가와 충고한다.
“선빵을 날려. 애들 싸움은 있잖아, 기선제압이거든!”

이 한마디로 영화는 당시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70년대 유신시절 말기는 학교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군사독재의 폭압으로 물들어 있었다.
학교는 개발과 성장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교육하면서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생존경쟁을 주입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주먹으로 상대를 제압하든가 공부라도 잘해야 인간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을 가진 자를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도 언젠가는 체제의 부조리와 사랑이나 믿음 따위의 감정 변화에 혼란스러워하고 그러면서 성장한다.
사랑과 친구를 잃고 괴로워하던 현수는 우식의 말대로 ‘선빵’을 날리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미 훌쩍 커 버린 그에게는 ‘짱’같은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 영화가 유신시절 고등학교 잔혹사를 서술한 ‘성장영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덧붙여서, 은주가 친절한 현수대신 멋지지만 위태로운 우식을 선택하는 것에서 주는 교훈 한 가지. ‘미인은 양아치를 좋아한다!’

김경란 기자 eggs95@labornews.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