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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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새해가 밝았다. 햇수의 헤아림 자체가 가없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 작은 물결 하나를 집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새해는 누구에게나 늘상 설렘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지난날이 힘들수록 더욱 그런듯하다. 형편이 좀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일 가운데 노사관계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해 노사관계는 예전과 다름없이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연이은 죽음의 절규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사건은 교훈으로만 남고 실천적 개선은 제도상으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사관계에서 전체적으로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변화나 뿌듯한 보람으로 기억될 만한 큰 성과는 눈에 띄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더욱 팍팍해졌고 대립과 갈등으로 깊이 상처 입은 노사정 관계만이 앙상한 과제로 남겨졌다. 그렇다고 희망찬 꿈마저 일부러 포기할 이유는 없다. 밝은 내일은 어제의 어두움에서, 봄의 새 삶은 한 겨울 추위 속에서 준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확실성 속, 경제회복 전제조건의 의미

올해도 각계각층에서 새해 포부와 다짐을 밝혔다. 각기 처지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 하지만 결론은 실의와 좌절을 딛고 희망과 재기의 한해가 되게 하자는 데로 모아진다.
하지만 정세전망은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집약되고 이 때문에 다짐에 맥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정치,경제,사회,한반도정세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경제상황에 대한 정부의 전망은 무엇보다 밝다. 올해는 경기가 회복되고 경제성장은 작년의 배에 가까운 5%를 웃돌 것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경기침체로 인해 꼬였던 문제들이 잘 풀려갈 것이란 예상이다. 세계경제가 회복되고 수출과 함께 투자와 내수도 늘어날 것이라는 근거에서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서가 붙어 있다.
노사관계 안정과 카드사태 해결과 북핵문제의 안정이다. 여기에 4월 총선의 혼란이 없어야 한다는 주문도 붙여져 있다.

한편 경기회복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고 청년실업률, 증가일로의 가계부채, 저소득 계층의 확산, 금융신용불량자의 범람, 불안한 장래 예측 등등에 대한 개선책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 소비가 늘어날 여지는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게다가 경제성장과 고용증대의 정합성이 경제개발시대처럼 부활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결국 경기회복과 경제성장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이 대다수 근로서민대중의 삶의 조건 개선으로 직접 연결될 개연성은 낮아 보인다.
그래도 심각한 침체보다는 경기회복과 경제성장이 더 낫지 않겠는가. 정부 전망은 바로 이점에 착목하여 전제조건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한 노사관계 안정이란 노동자 스스로 자제하고 협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북핵문제 안정을 위해서는 민족자주를 고집해서 미국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되며 4월 총선에서도 정치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수선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정부의 낙관적인 경제전망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계급’도 ‘민족자주’도 ‘정치개혁’도 모두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날을 세운 공세와 정부의 대응

헤아리기 곤란한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앞의 경제전망은 올해 노사관계 역시 긴장될 수밖에 없음을 예시해준다. 자본은 구조조정과 경영합리화의 고삐를 더욱 강하게 당길 것이고 노동의 방어적 저항 역시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노사간에는 뜨거운 쟁점이 떠올라 있다. 주5일제 시행, 구조조정, 노사관계법제도선진화방안 등이 그것들이다.
자본은 국제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비용 축소와 노동의 유연화를 더욱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 점에서 주5일제는 임금보전 없는 것이 되어야 하며 노사관계 개혁은 노동에 대한 강한 통제를 그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이 싸고 노무관리도 손쉬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위협한다.

자본의 치열한 요구는 경총의 신년사에 날이 선 모양으로 투영되었다. 경총의 얘기에는 노동자를 위한 베품의 말은 인사치레라도 한마디 찾기 어렵다. 나라경제를 위해 스스로 무얼 하겠다는 것보다 기업하기 좋게 환경을 조성하는 특단의 조치가 사뭇 경고조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비용논리, 노동유연화, 선성장-후분배론으로만 치닫는 자본의 완강함 앞에, 기업 스스로 참여와 협력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강성노조의 무파업선언 우선론을 고집하는 완고함 앞에서 노사관계의 발전이나 안정은 쉬 찾기 어려울 듯 하다.

이처럼 노사간의 대립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주목되는 것은 역시 정부다. 지난해 노무현 정부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을 정책 기조로 내세웠고 올해도 이를 유지, 발전시키겠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논리는 여전히 우세하며 쉽사리 바뀔 것 같지도 않다. 여전히 현 정부에게 경제회복은 최대 현안과제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친노동자 성향과 개혁철학에 대해 아직도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은 총선에서 집권여당이 압승하여 다수당이 될 경우 정책의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한계 역시 분명하다. 도도히 범람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정부는 노사관계 개혁을 계속 추진하고 올해 일자리 만들기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최상의 과제로 밝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일자리 창출은 이 시대 이 사회의 최대강령이자 노사관계 안정의 기초조건이다.
그러나 사용자 대항권과 노동기본권 보장을 등치시키고 파업무력화 음모라고 규탄 받는 이른바 노사관계 로드맵이 쉽게 개혁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저성장-고실업의 성장패턴의 변화 속에서, 변화무쌍한 기술변화와 기업 업종의 끊임없는 부침 속에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부 스스로 나서 공공부문에서부터 직장과 소득이 안정된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자본이 먼저 스스로 비용의 논리를 넘어 고용확대 및 안정에 나서도록 한다면 참여와 협력의 시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앞당기는 것은 그리 먼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노동운동의 기회와 선택

노동운동 진영은 올해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고용안정 및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해 총력전을 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력,자본권력,언론권력으로부터 협공당하는 형세는 부인할 수 없으며 전과 다름없이 방어적 수세에 머물고 있다는 것도 숨김없는 현실이다.
노동조합운동은 자칫 일반국민만이 아니라 같은 노동자계급 내부로부터도 고립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올해 노동운동은 이런 위기로부터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고 노사관계의 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들을 맞고 있다. 산별노조의 발전과 조직 확대, 민주노총의 새 지도부 선출, 4월의 총선이 그것이다.
이 모두는 노동조합운동 스스로 제기해왔던 운동혁신의 핵심과제들이다. 산별노조의 발전과 조직 확대는 조직적 개혁과제이며 민주노총의 선거는 지도력 확립과 내부운영혁신의 계기이고 4월 총선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꿈을 실현하는 개혁의 장이다.
이들은 집단적 이기주의의 오명을 씻고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의 노동자의 자부심과 노동운동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결정적인 사업이기도 하다.

문제는 주어진 기회에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있다. 여기에는 언제든 장애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를 뛰어넘어 목표를 달성하고 최소한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일구어내는 일은 온전히 노동운동의 몫이다.
그리고 이들이 올바로 가도록 힘을 돋구어주고 밀어주는 일은 진보민주세력이 맡아야 할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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