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상 전국언론노조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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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2월16일 박승 한국은행 총재로 열린 금융협의회에서 일부 시중은행장들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영업망과 높은 신용등급, 고도의 금융기법 등을 배경으로 국내 금융시장을 공략해 국내 우량고객과 우량 금융상품을 크게 잠식할 우려가 있다”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국내자본을 역차별하고 있는 은행 지배 및 소유에 대한 현행 규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현행 은행법은 금융업에 진출하는 산업자본이 10%를 초과해 은행 주식을 보유할 수 없으며 의결권 행사는 4%까지만 가능하도록 돼 있는데, 이런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의결권 행사가 가능한 지분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얘기다.

역차별을 구실로 내건 이런 요구는 무시무시한 주장이다. 산업자본을 감시하는 은행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은행이 기업 가치를 훼손시키는 쪽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 경영진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으려면 언제든지 꿔준 돈을 회수할 수 있는 위협이 가능해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 ‘한 통속’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폐해를 무시한 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사돈관계에 있는 <동아일보>는 쌍용자동차 인수를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중국 기업이 선정됐다는 사실에 분기탱천해 12월18일자 사설 ‘한국주식회사 경영주권 어디로’에서 “출자총액제한과 은행 지분 소유제한 등으로 국내 자본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는 역차별을 없애야 한다”며 얼빠진 은행장들에게 맞장구를 친다.

<한국경제>도 마찬가지다. 12월19일치 사설 ‘역차별이 불러온 SK사태’에서 “외국투기자본이 설쳐대는데도 출자총액제한이다, 은행주 소유제한이다, 하면서 온갖 명목으로 내국인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경영권 방어가 쉬울 리 없다”고 통탄한다.

이런 주장은 ‘참주선동’일 뿐이다. 은행에 대한 소유,의결권 제한 규정은 자본 국적에 따른 역차별이 목적이 아니다.
국내 산업자본은 물론 외국계 산업자본에게도 해당되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분리’라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동안 외국 자본이 이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았던 것은, ‘외국계’여서가 아니라 단기차익을 노리기는 하지만 ‘금융’ 자본이었기 때문이다.

2. 은행장들의 주장에는 초국적 외국계 은행들의 국내 은행 인수를 사실상 막아달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그들과 경쟁할 능력이나 자신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이는 실력도 없으면서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보다 백 번이고 좋은 일이다. ‘공적자금 회수’를 구실로 은행 민영화를 다그치는 정부에게 보내는 경고 효과도 있다. 그런데 전,현직 경제관료들은 서로 작당해 ‘골 때리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헌재 펀드’ 구상이다.

지난 12월6일 대규모 국내 사모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라는 재정경제부의 발표를 전후해,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과 그 똘마니 노릇을 하던 전 금융감독위원회 대변인 김영재씨 등이 내년 초에 3조원 규모의 ‘이헌재 펀드’를 만들어 우리금융지주회사에 대한 정부 지분(87.7%)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매일경제>는 12월18일치 사설 ‘주목되는 이헌재 펀드 구상’에서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국자본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것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산업자본의 금융 진출에 대한 규제를 풀어 역차별 요소를 원천적으로 없애는 것이 중요하지만 대규모 토종 펀드를 조성해 대응하는 것도 급한 대로 쓸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여겨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에게, 국내 사모펀드에 은행 민영화를 한다는 주장은 우파 민족주의 발상의 극치이자, 동시에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놓치지 않겠다는 경제관료들의 꼼수를 보여주는 결정판으로 비친다. 사모펀드란 50~100명 미만의 소수 투자자들로부터 돈을 모아 주식?채권 등에 굴리며, 단기 평가차익이나 고수익을 노리는 것이다. 이헌재 펀드 역시 사모펀드인 이상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캐피탈이나, 에스케이그룹 경영권을 위협하는 소버린과 같은 외국계 펀드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네 해법이 뭐냐고? 정부가 안 팔면 된다. 정부 지분이 있으면 ‘관치’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내부 감시체제(노조 추천 감사나 사외이사)를 포함해 정부 지분이 있는 은행의 지배구조를 잘 짜는 것이다. 삼성생명과 국민연기금 등이 보유하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보험계약자의 돈이 이건희 삼성그룹 총수일가의 경영권을 뒷받침하는 쌈짓돈 구실을 하는 삼성생명의 지배구조가 바뀌고, 연기금 운용방향을 결정하는 데 연금 가입자의 참여가 보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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