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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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서민대중의 삶이 얼어붙는 듯한 세밑에 한편에서는 뜨거운 한판승부가 벌어지고 있다. 불법 정치자금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전이다.
정치자금에 대한 말썽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세인의 관심을 끌만한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자금의 규모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 거래방법이 기발하다는 점, 노무현,이회창 두 대통령 후보의 맞장뜨기가 또다시 등장했다는 점, 검찰이 전례 없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는 점 따위가 그러하다.

게다가 사건의 강도에 비추어 어떤 형태로든 정치개혁이 진전되리라는 기대감이 있다는 점도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이 나라를 지배해온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동맹군들은 갑자기 밀어닥친 태풍과 해일에 얻어맞은 듯 정신이 없다.

정치권과 재벌을 위협하는 검찰의 고속질주

역대 총선거와 대선 때마다 선거자금이 수백억 수천억 들었다는 풍설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얼마를 주고받았는지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이 추산한 바에 의하면 한나라당이 작년 대선 때 재벌기업에서 울궈낸 돈은 7백억원에서 1천억원 규모이다. 2천억원이 넘는다는 얘기도 있다.

손길승 전 전경련 회장은 “승리하면 표적사정 운운해 100억 더 줬다”고 했다. 5, 6공 때 전두환, 노태우가 재벌총수들을 청와대에 모아놓고 직접 긁어냈다더니 가히 그 후예다운 모습이다. 돈을 건네는 방법도 조폭들의 밀거래 비슷한 냄새가 많이 난다. 이것이 ‘대쪽후보’를 내세워 “나라다운 나라” “깨끗한 정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던 한나라당의 뒷거래 모습이었다.

집권세력은 애써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타들어가는 속내를 일일이 감추기는 어려운 듯하다. 한나라당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든가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거출하여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권력의 핵심인물들이 혐의선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판국에 궁색하기 그지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1/10 폭탄선언도 그 맥락에 서 있다. 정치개혁에 대한 열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하지만 불법정치자금을 거두었다는 데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함께 위기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또 하나의 집단은 재벌들이다. 전경련은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국민에 대한 사과성명을 냈다. 그 속에서 국민 실생활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조속한 수사종결을 요구하고 불법정치자금을 낸 기업을 처리하는데 “합리적인 배려”를 당부하였다. 경제파장을 미끼로 사법처리를 최소한으로 줄여보겠다는 속셈에서이다.

재벌의 우군들은 교묘한 논리로 재벌의 억울함과 조기수습을 강조한다. 기업이 정치권력에 의해 운명이 좌우될 정도로 영향을 받는 현실 속에서 “돈 주고 뺨맞고 감옥까지 가야”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정당에 수사초점을 맞추고 기업은 합리적으로 대우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처럼 정당들과 재벌들이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고 축소 은폐와 조기수습에 목을 매는 것에 비해 거침없이 고속질주를 거듭하고 있는 쪽은 검찰이다. 그 때문에 이탈리아의 ‘깨끗한 손’처럼 정치검찰의 탈을 벗고 정치부패를 척결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검찰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촉진하고 정치개혁을 앞당길 수 있도록 검찰을 신뢰하고 응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과거 보수언론과 정치권이 상용하던 “경제적 악영향을 고려한 조기수습론”을 강력히 차단해야 한다는 여론도 검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경계해야 할 보수대타협

도대체 그 엄청난 돈들은 어디서 나오며 기업주들이 정치권에 선뜻 갖다 바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경유착의 뿌리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고 깊지만 그 이유에 대한 답은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의외로 단순하다. 우선은 줄 여력이 있기 때문이고 그 원천은 노동자의 피땀에서 나온 것이다.

지불능력이 없다고 단 0.1%의 인건비 인상까지도 기업들은 엄살을 부렸다. 기업이 어렵다고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를 대량으로 밀어내고 훨씬 싼값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이용함으로써 막대한 노동비용을 절감하였다.

물가상승분이나 노동생산성 증가분보다 항시 낮게 오르는 임금인상추이는 이미 한국경제론의 상식으로 통한다. 여기다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막대한 이윤을 축적할 수 있었고 지배 권력의 그늘아래 외국차관, 재정투융자, 조세 금융상의 특혜를 이용하여 손쉽게 부를 쌓아올렸다.

한줌도 안 되는 주식으로 수조원의 공룡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재벌총수에게 수백억원쯤 정치권에 갖다 바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운동을 눌러주고 제도,법률,정책상의 특혜를 베풀어준데 대한 대가이자 미래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동맹관계 지속을 담보받기 위한 투자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자금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항시 비자금이 조성되어 있어야 하고 비자금을 위해서는 회계부정과 분식결산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런 구조 하에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역대 모든 정권의 공약은 구두선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정치권은 지역주의로 희석시켜 버렸다.

이런 현상은 정치의 지역주의 의존도와 국민의 냉소주의를 갈수록 확대 심화시켰다. 저들은 이 두 가지 모순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검은 밀착을 계속해오다가 이번에 그 일부가 드러나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번 사태는 과거처럼 적당히 봉합하여 넘기기에는 어려울 만큼 드러나 버렸고 국민의 관심도도 저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높아져 있다. 총선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자칫 빅뱅이 일어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수준에서 사태를 진정시켜 적당한 선에서 위기를 넘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치밀하게 불법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다는 정치 선진국에서도 정경유착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판에 보수 기득권이 강력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데다가 개혁 진보세력이 그에 맞설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감옥에 가겠다고 하면서 미리 검찰에 출두한 것도 심상치 않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테니 이 선에서 끝내자는 메시지로 들리기 때문이다. 검찰 만능주의의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체제의 수호자인 검찰이 기존체제의 붕궤라는 위험한 도박을 원치 않을 것이고 보면 다시 진일보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의 여지를 제공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아직 검찰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한 처지에서 검찰이 정치개혁의 모든 것을 담보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다 더 정교하고 치밀한 보수대타협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정치개혁의 핵심

보수정당의 이전투구를 탓하거나 우려할 것은 없다. 오히려 더 열심히 싸워서 더러운 모든 것을 다 드러내라고 격려할 일이다. 국정이 마비되고 경제가 어려우니 빨리 마무리하라는 얘기는 적당히 덮고 넘어가자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무시해도 좋다.

노동자들 때려잡는 일은 못마땅하지만 검찰에게도 치부를 모두 드러내버리라고 격려의 박수라도 보내야 할 일이다. 기업에게도 차제에 권력에 떳떳한 기업이 되게 투명하고 건실한 경영을 하라고 촉구해야 한다. 썩어빠진 정상배 패거리들은 해체되어야 하고 감방에 갈 사람은 빠짐없이 보내고 속죄할 사람은 속죄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하나의 제도로 정착되어 올바른 정치개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우리 노동자들이 개입할 여지는 극히 좁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검은 거래가 그 원천을 노동자들의 피땀에 두고 있음에도, 정치개혁은 정치인의 것이 아니라 재벌개혁, 노동개혁과 한축을 이루고 있음에도 정작 노동자들의 발언권은 멀리 밀려 있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절감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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