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 대전충청지역건설산업노조 조직국장


건설현장에서의 노동조합 활동이 공갈협박, 금품갈취 등으로 몰려 노조 활동가들의 구속수감, 출두요구서 발부 등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지역건설노조 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면모를 보여주는 2개의 글이 들어왔다.

박지현 대전충청지역건설산업노조 조직국장은 중대재해로 산재 1급 장애인인데도 구속 수감돼 있는 노조 이성휘 위원장에 대해서, 이미영씨는 대전, 충청에 이어 경기 안산으로까지 확산된 공안수사 과정에서 출두요구서를 발부받고 현재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남편 경기서부지역건설노조 김호중 부위원장에 대해 썼다.

박지현 대전충청지역건설산업노동조합 사무국장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우공이산 愚公移山)’는 말은 언제나 묵묵히, 힘든 몸을 이끌고 고집스럽게 현장을 다니시던 이성휘 위원장을 두고 하는 말인 듯 하다.

우리 노조 이 위원장은 지역건설노조를 공갈협박단, 금품갈취단으로 모는 검,경의 탄압 때문에 현재 구속 수감돼 있다.
지난 95년 외선전기공인 이 위원장은 근무를 하던 중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22,000kw의 고압 전기에 감전되는 중대재해를 당했다. 사고로 인해 한 팔과 양쪽 다리를 모조리 잃어 1급 장애인이 됐으나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투병생활을 하셨다.

산재 사고 이후 힘든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일하면서 같이 일하던 동료가 죽거나 다치는 것을 수도 없이 봤다. 그 때는 그 사람들이 재수가 없어서 사고가 났다, 안 됐다, 다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다치고 나니 이건 내 문제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앞으로 혼자 걸어 다닐 수 있다면 노동조합에 나가겠다.
나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고, 나 같이 사고를 당한 사람이 앞장서서 일하면 산재사고를 막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시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셨다.

재활 치료 이후 한 팔과 두 다리에 모두 의수와 의족을 끼워 넣고,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매진하셨다.
노동조합의 상담실장으로 일하면서 현장에서 억울한 사연들은 내 일인양 들어주고, 특히 산재사고에 관해서는 힘든 몸을 이끌고 어디든 다니며 해결하려 하셨다.
전기공 출신인 이 위원장은 전기 현장은 도맡아 다니면서 조합원들을 만나러 다녔고, 무엇보다 저녁 술자리가 많아져 몸이 많이 축나는데도 조합원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가셨다.

아픈 다리로 현장을 다니고 저녁에 조합원들과 술잔 기울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늦어지고 다음날이면 다리가 퉁퉁 부어 걷기 힘들어하였지만 어김없이 출근해서 현장을 다녔다.
몸 상태가 건강한 사람들과 다르다고 활동도 다르게 하신 적 한번 없다.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현장 다니고, 무엇보다 천막농성이며 노숙투쟁 한번 거르신 적이 없는 분이다.

건설현장에서 단체교섭을 할 때, 힘들지만 현장이 조금씩 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있다면 자주 웃었다.
위원장님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고, 마음이 여려 다른 사람 부탁 한번 거절 못하는 아이 같은 면이 많으신… 그래도 투쟁현장엔 언제나 앞장서서 싸우시는 그런 분이다.



이미영 경기서부지역건설노조 김호중 부위원장의 부인

1993년 호중씨와 결혼을 하고 노동자들의 동네인 부천시 원곡동 다가구 주택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호중씨는 현장에서 제관공으로 일용직 노동을 하였고, 6시 퇴근 후면 어김없이 조합에 가서 회의 등의 조합 활동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번듯한 사무실 하나 없고, 회의라는 것도 지금처럼 체계가 잡힌 것이 아니어서 저녁에 순대에 소주 한 잔 걸치면서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나 서로 일자리를 주선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 어떤 것보다 그렇게 노조 일을 본답시고 새벽에 들어와서 쉬지도 못하고 다시 새벽에 출근하는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바가지도 많이 긁었고, 어떻게 하면 그 짓을 때려치게 만드느냐 하는 고민도 많이 했다.

그래도 그렇게 1년, 2년… 시간은 잘도 흘러만 갔다.
허름한 월세 사무실을 이곳저곳 전전하다 건설노동자들에게는 재앙이자 직격탄이 된 IMF를 맞게 되었다. 호중씨는 특유의 헌신성으로 노동조합에 본인이 무임으로라도 상근을 하겠다고 선포하고, 나에게는 돈을 벌라고 하였다.

당시에 아이는 아직 5살이었고 손이 꽤 갈 시절이었는데 성남 시댁에 맡겼다.
상근을 하며 최소한의 생활을 꾸리기 위해 아이 아빠는 순두부 장사를 시작했다. 매일같이 새벽 5시에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에 있는 순두부 도매상에서 물건을 사 와서 안산역 앞에서 한 냄비씩 끊여서 천원에 팔았다.

그러던 중 나는 노동부를 통해 J전기라는 회사를 소개 받아 출근하게 되었다.
새벽에 아이 아빠와 함께 순두부를 팔고 나서 아이 아빠는 노동조합으로, 나는 회사로 각각 출근하였다. (그런데 난 3개월 수습으로 들어간 것이었는데, 임금이 계속 체불되더니 결국 체불임금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만 두게 되었고 한참 후에야 임금을 받았다.)

아이 아빠는 무급 상근이었지만 정말 헌신적으로 일했다.
새벽 5시부터 나와 순두부로 1,2만원 벌고, 그것으로 매일 아침 요기를 하고 나서 한 두평 하는 월세 사무실 책상에 앉아 조합원들에게 일자리를 소개하고 임금체불, 산재 등을 상담 받아 처리하곤 하던 아이 아빠의 일상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왜 이리 불쌍해 보였는지, 자기가 좋아서 고집스럽게 했던 일인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싸운 덕분에 안산역 앞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가 안산시로부터 노동조합 사무실로 인가받게 되었다.

드디어 월세 때문에 이리 저리 쫓겨 다닐 걱정 안 해도 되는 노동조합 사무실이 생겼고 당시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성장을 해 나갔다.
그 때 제일, 그리고 절실했던 것은 ‘힘’이었다. 서러움이 많아서였겠지만, 누군가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믿음, 독려… 그런 것들이 절실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꿋꿋이 노동조합 일을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노동조합을 사랑하긴 하나 보다.

호중씨는 지금 차가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호중씨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무슨 공갈협박단처럼 몰고 가는 공안탄압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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