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노조 서울시극단지부장 김신기


광막한 광야에 /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 그 어데이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

1926년 8월5일자 동아일보는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남녀의 정사’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 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그 승객 명단에는 남자는 김우진이오, 여자는 윤심덕이었다.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死)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더라…”

윤심덕은 조선총독부의 추천을 받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에 유학하여 성악을 전공한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다.
홍난파와 동기생으로 음악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극작가 김우진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윤심덕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김우진은 유부남이었다.

이런 김우진과의 관계는 결국 많은 민중들에게 재능 있는 음악가로서의 윤심덕보다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여인 윤심덕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의' 라는 관형어가 따랐다. 최초의 여성 성악가, 최초의 자유연애자, 최초의 레코드 가수.
1925년에 일본 축음기 회사(후의 일본 콜럼비아 회사)에서 우리말로 된 가요를 녹음하였는데 이 음반이 성악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레코드 가수임을 기록한다.

또한 그녀가 죽기 전에 녹음했던 '사의 찬미'는 우리나라에서 가요곡으로는 최초의 히트곡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노래는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에 김우진과 윤심덕이 가사를 바꾼 것으로 돈, 명예, 사랑도 다 싫은 상황에서 슬픔과 허무주의의 극치를 보여준 노래다. 서른 살의 짧은 삶을 선택한 그녀가 부른 노래로는 너무도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신여성잡지에 전하는 그녀의 인상은 이러했다.
'입은 성악가인 만큼 발달이 잘 되었고 스타일은 그야말로 동양여자로서는 구할 수 없는 맵시 좋은 스타일의 소유자이다. 이외에도 잘하는 것은 일본말과 빨래, 바느질이다. 지나치게 활달한 언행은 남들로 하여금 왈패라 부르게 하나니…' 라고.
훤칠한 키와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스스럼없는 교제들로 여러 남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인지 스캔들도 많았다.
'울밑에 선 봉선화'를 만든 홍난파와 격정적인 염문을 뿌리기도 하였으며,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고향'의 작곡가 채동선의 사랑 고백을 물리쳐 울게 만들었고, 일본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으로 하여금 상사병에 걸려 병사케 하는 등 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 신여성이었다.
귀국 후 가수로 활동하던 중 홀연 중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와 연극계에 투신한 윤심덕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금번 내 생활의 전환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물론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여자란 배워서 가정으로 돌아가 현모양처가 되거나 교사가 되고 간호부, 사무원 같은 것이 되어 말썽 없이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특히 배우라는 것은 부랑무식한 타락자나 하는 일로 알아 온 이상 나의 이번 길은 갈 곳까지 다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나섰습니다. 오로지 힘을 다하여 새로워지려는 당돌한 발걸음이 이에 이르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 말은 그녀가 당시 천대받던 배우의 길을 선택하면서 얼마나 당찬 의지를 가졌는가를 보여준다.

일제의 지배 하에 있던 시기에, 더군다나 여성의 사회참여가 막혀있던 시기에 그녀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대중문화를 태동시키기 위해 당당히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당당함으로 무장한 윤심덕도 비극적 삶을 운명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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