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쉬워도 실천은 어려운 것이 세상이치지만 국제노동자연대만큼 그 당위와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천에 옮기기도, 내용을 채우기도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더구나 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라는 말이 일상화되고 IMF 위기 이후 세계화된 자본 앞에 일국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절실히 깨닫고 나서도 국제노동자연대는 그 필요성과 당위만큼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 한 가운데서 묵묵히 일본과 한국노동자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 15년을 한결같이 뛰어온 노동자가 있다. 전일본항만노조 관서지방 건설지부 부집행위원장인 나까무라 다케시.
지난달 29일 일본 자유법조단 주최로 교또에서 열린 ‘비정규 문제 대응방안’ 토론회를 취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길에 오사카에서 그를 만났다.

한-일 노동자는 왜 연대해야 하는가

먼저 왜 두 나라 노조운동이 교류해야 하느냐는 다소 공격적인 질문은 던져봤다. 노동자의 국제연대라는 당위적이 답변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추가 질문을 준비하긴 했지만 그의 대답에는 노동운동의 절실함이 묻어 있었다.
“일본과 한국은 사회체계가 비슷하고 자본가들도 열심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양국 자본가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데 반해 우리는 함께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법률체계의 유사함은 노동법에 있어서 양국간의 영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한국은 이미 노동법 제정당시에 일본으로부터 노동법 체계를 그대로 수입했고, 지난 98년부터 시행된 근로자파견법도 일본 것을 가져왔다. 더구나 지난 6월 일본 국회를 통과한 노동기준법과 노동자파견법은 비정규직을 더 양산하고 노동자들의 해고를 더욱 쉽게 할 수 있도록 돼 있어 우리나라에도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우려되고 있다.
노동법 개정으로 일본은 파견기간 제한을 1년에서 3년으로 늘렸고, 전문업무 등 26개 업무에 대해서는 3년 기간제한을 없앴으며, 제조업 직접생산공정 업무에도 파견을 허용했다. 또한 노동계와 법조계 등의 반발로 완화되긴 했지만 일본 정부는 ‘법률로 제한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사용자는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사실상 ‘해고자유화’를 추진하려 했는가 하면, 계약직의 계약기간도 1년에서 3년으로 늘렸고, 과로사의 온상이자 무급 연장근로를 강제하는 재량노동 허용업무도 대폭 확대했다.
다. 이와 함께 노동법 위반에 대해 형사처벌을 받게 돼 있음에도 정리해고에 대해서는 형사책임 조항을 마련하지 않고 민사적 책임 영역으로 남겨놓았다.
“결국 일본 사용자들은 부당해고에 대해 민사상 책임만 지겠다는 것입니다. 한국 자본가들이 일본의 노동법 개악을 보고 배울 것이고 한국 노동법 개악요구로 이어질 것입니다. 양국 자본가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함께 움직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일본 노동계는 이 같은 노동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한국과 함께 기업별노조에 기반하고 있는 일본 노동계는 고용안정과 고임금을 보장받는 대기업 조직노동자들과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심각한 양극화를 겪고 있다.

“양국 노동자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함께 발전해야 합니다. 기업별노조 체계라는 같은 한계를 안고 있고 이를 함께 극복해 가면서 노동운동을 회생시켜 나가야 합니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교류하느냐에 한일 노동운동의 발전 여부가 달려있습니다.”
그의 염원을 반영하듯 그가 입은 점퍼 위에는 ‘한-일연대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가 한국말로 적혀 있었다. 일본에서 본 우리말이 반가우면서도 왜 일본어로 쓰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일본 노동운동은 사회적 역할과 이념을 잃어버린 지 오랩니다. 매년 봄 임금인상 투쟁이 전부인 일본 노동계의 현실이 부끄러워서 일본어로 쓰지 못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국 노동운동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대한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 에너지가 바싹 말라버린 일본 노동운동에 들불을 놓는 불씨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89년 아세아스와니 원정투쟁단 활동, 그 시작

그의 한국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은 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에 본사를 둔 아세아스와니는 전북에 있던 한국공장을 폐쇄하고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려 했다. 졸지에 길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스와니 본사가 있는 일본 시코쿠로 지리한 원정투쟁에 나섰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노동계가 지원에 나섰고 나까무라씨도 전일본항만노조 소속으로 지원단에 합류했다.

한일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은 결국 공장폐쇄를 막지 못하고 끝이 났지만 단식투쟁까지 벌였던 한국 원정투쟁단의 모습은 일본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양국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연대를 약속으로 남겨놓았다.
그렇게 이듬해부터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하고 올해까지 나까무라씨는 25번이나 한국을 오가며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 노동자들과 연대의 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 교류라는 것은 서로 얼굴 보면서 아는 사람을 많이 만드는 게 전부였습니다. 통역도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연대에 대한 의식도 높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까무라씨는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꾸 한국말이 서툴다고 무안해 하지만 15년을 거슬러 오면서 그의 한국말 실력은 통역 없이도 의사소통에 전혀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참고로 그는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이 쓴 ‘간부활동론’을 일어로 번역해 지난해 여름 책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10여년이 흐르면서 한일노동자 교류도 함께 발전했으며 4년 전부터는 내년 5월과 9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민주노총 전북본부와 주제를 잡아 함께 논의하는 과제별 교류에 나서기도 했다. 민주노총 전북본부와 전항만노조 건설지부간는 지난해 산업안전문제를 교류했고 올해는 반전평화에 대한 교류가 이어졌다. 군산미군기지 철회 투쟁과 일본 오사카 항에 대한 군사항 저지 투쟁이 맞닿았다.
내년에는 지방자치단체의 입찰과정에서 용역업체 문제를 집중 조명할 계획이다. 용역업체가 바뀔 때마다 노동자이 해고되고, 저임금을 강요받아야 하는 현실은 양국 모두 같다. 용역업체가 바뀌더라도 기존 노동자들을 고용승계해야 하고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겠다는 것 등을 입찰조건으로 만들어낼 계획이다.

민주노총 명예조합원 되다

나까무라씨가 지난 11월 방문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2주 전 모친상을 당한 상황이었다. 2차대전 중 남편을 잃은 그의 어머니는 60여년을 홀로 그를 키워왔다. 아직 49재가 지나지 않았다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그가 한국을 찾은 이유는 한국 노동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또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을 보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총 전북본부 조문익 비대위원장은 그를 “한일 노동자가 국경을 넘어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자 진정한 우리의 동지”라고 말한다.
전북본부는 내년 전북노동운동사 20년사를 편찬하면서 그 한편에 나까무라씨를 중심으로 한 전일본항만노조와의 15년 교류사 정리 작업도 한다.
이제 나까무라 선생은 내년이면 환갑을 맞아 정년퇴직을 한다. 민주노총 전북본부는 그에게 명예조합원 자격을 줄 계획이다. 그리고 그의 환갑잔치를 열어줄 것이다.
이야기가 한창이던 오사카 건설지부 사무실에서 난데없이 노래가 울려퍼졌다. ‘민주노조 깃발아래…’ 철의 노동자다. 전화벨 소리였다. 놀라면서도 반가운 표정인 기자를 보고 나까무라씨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는 만다.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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