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와 끊임없는 구조조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급속한 확산.
거품경제가 붕괴하면서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 있던 일본 경제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은 고용불안 심화와 더욱 열악해지는 노동조건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고 있었다.
일본의 노동자들은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직접고용에서 간접고용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으며 노동조건은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다. 이제 평생고용과 고임금은 몇몇 대기업 노동자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고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확대로 노동자들 내부의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 정부조사에 따르면 지난 99년 2월 전체 고용인구의 24.9%이던 비정규직은 지난해 12월 30.5%로 기록했다. 올 6월까지 30%선에서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6월말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뼈대로 한 노동법 개정으로 올 하반기 이후 노동현장에서 다시 급속한 비정규직의 확산이 시작되고 있는 실정이다.

6월 노동법 개정 이후 더 늘어나는 비정규직

오츠카 운송회사의 사례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회사는 지난해 400명 직원 가운데 300명이던 정규직을 1년 사이에 117명으로 줄였으며 이들도 계약직 파트타임 노동자로의 전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회사는 근속년수과 임금수준이 높은 정규직부터 파트타임으로 전환시키고 있으며 이를 거부할 경우 회사를 떠나라고 강요해 왔다. 아직 파트타임 전환을 거부하고 있다는 하가씨는 “회사가 비정규직 전환을 거부하는 노동자들에게 야근이나 회사건물 수리 같은 일들을 시키고 있다”며 “최근에는 전환 거부를 이유로 상여금까지 대폭 삭감시켰다”고 말한다.
현재 비정규직은 30% 선에 머물고 있지만 지난 6월말 고이즈미 내각이 “경제에 활력을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파견을 거의 무제한으로 확대하고 해고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노동법 개정을 단행함으로써 비정규직 규모는 다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특히 개정된 일본의 노동기준법은 기간의 정함이 있는 노동자들을 3년까지 고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해고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해 놓았다. 또한 지난 85년 직접고용에 대한 예외조항으로 전문업무에 대해 합법화 됐던 노동자파견법은 몇 차례 개정을 거쳐 거의 전업종에 걸쳐 3년까지 파견할 수 있도록 됐다.
파견법 개정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정규직 업무가 파견으로 대체되고 심지어 계약직 조차 파견노동자도 대체되면서 노동자들의 고용형태가 더욱 불안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최대 여행사인 JTB는 올 7월부터 계약직 여행가이드를 파견직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1년 단위 계약을 자동갱신해 왔다는 다까하기 에미꼬씨는 7월말 평소보다 일거리가 1/4로 줄어든 근무배정표를 받아야 했다. 더구나 동료 4명은 아예 배정표에서 빠졌다. 8월에는 일거리와 인원이 더 줄어들었으며 그 자리를 파견노동자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다까하시씨는 “파견노동자들은 우리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임금수준은 우리들의 1/3에 불과하고 아침 일찍 나오거나 택시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에도 수당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자유법조단 교또지부 후꾸야마 변호사는 “이는 심지어 비정규직들 사이에도 차별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일본 노동계가 노동자들의 양극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별 조직, 기업별 의식 극복 절실”

지난달 29일 아나호텔에서 열린 비정규직 확산에 대한 대처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회에서는 100여명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특히 한국의 비정규직 운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참석자들은 한국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적극적인 비정규직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90년대 이후부터 파트타임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한 자립노동연합의 다나까씨도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지 않으면 정규직의 노동조건도 향상되지 않는다”며 “사용자들이 한국의 억압을 배우기 이전에 일본 노동계가 한국 노동자들의 저항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다나까씨는 “파트타임 노동자들이나 사용주 모두 이들이 노동기준법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자립노동연합이 파트타임 노동자 보호를 위해 벌이고 있는 조례제정 운동을 소개했다. 이 조례는 교또 지역의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제정한 것으로 파트타임 노동자들에게 노동기준법을 적용하고 퇴직금제도를 만들도록 해당기업에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나까씨는 “물론 비정규직을 조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권고수준인 조례제정만으로는 실효성이 적지만 조직화 활동을 보조하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개별 기업에서 파트타임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노조를 결성하는 등 성과를 보이는 사례도 있지만 일본 전체로 보면 불법파견과 비정규직은 더욱더 늘어나고 있다”며 “기업 내 운동으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대기업 중심의 기업별노조체계인 일본의 노동운동은 이미 심각한 조직률 하락에 직면해 있다. 2002년 현재 일본의 조직률은 20.2%이며 이는 지난 1984년 29.1%이후 한번도 늘지 않고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더구나 일본 후생노동성 자료에 따르면 1,000인 이상 기업의 조직률은 54.8%인데 반해 100인~1,000인 사업장은 16.8%, 100인 이하 사업장은 1.3%에 불과한 상황이다.
결국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대기업 중심의 노조활동으로는 조직률 급감을 막을 수 없으며 조직력의 하락은 노동운동의 어두운 미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본 노총인 렝고와 전노련 소속 조직이 모두 가입해 있는 교또총평 이와하시 사무총장은 “비정규직의 조직화에 노력하고 있지만 인원과 재정 부족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며 “비정규 문제 해결 없이는 노동운동의 앞날은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또 “일본이 한국과 같이 비정규직이 50%를 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일어서야 한다”며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한국 노동계의 경험과 활동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또의 교코구대학 와끼따 시게루 교수도 “파견법 개악이나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에 대해 노조들의 반응이 좋지는 않았다”며 “춘투로 대표되는 임금인상 투쟁으로 지금까지 조직노동자들이 일정한 성과를 보여왔지만 비정규직과 함께 투쟁하지 않으면 일본 노동운동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한국 노동계의 대응과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활동을 발표한 박승흡 이사장은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노동계가 조직적 실천에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렵다”며 “이러한 실천의 조직적 표현이 기업별노조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산업별노조로의 전환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박 이사장은 “한일간에 좋은 정보와 좋은 조직화의 사례들을 교환하면서 적극적으로 함께 모색해 보기를 기대한다”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양국 노동계의 교류와 공동노력을 당부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 나까무라 변호사는 “일본에도 비정규노동센터를 만들고 비정규직을 조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자는 오늘의 열기가 (토론회가 끝난 뒤) 지하철을 타는 순간 모두 사라질까봐 걱정된다”며 참석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강조했다.
여전히 일본 노동계는 30%를 넘어선 비정규직들을 조직하기보다는 대공장 중심의 기업별노조 체계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 참석자의 지적처럼 “나는 정규직이지만 내 아이들은 틀림없이 비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그 울타리를 뛰어 넘는 용기가 필요하다. 토론장에서의 열기가 일터에 돌아가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것을 극복하는 것과 함께 한국의 노동계와 일본의 노동계의 고민은 맞닿아 있었다.

* 자유법조단은 80여년전 오사카에서 발생한 노동탄압 사건에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하면서 결성된 진보적 변호사 단체다. 전체 일본 변호사들의 10%인 3,000여명이 가입해 있으며 일본 내 변호사 단체 가운데 가장 크다. 평화, 농민, 노동,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전국적인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투쟁적 노선을 견지하는 일본 노총 중 하나인 전노련과 일본 공산당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자유법조단 교또지부는 올해 설립 40주년을 맞아 지난 9월 한국을 찾아 민변과 비정규노동센터를 방문했으며 이번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한국의 비정규직 운동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초청했다.


일본 교또=김재홍 기자(jaehong@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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