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다그치기 위해 2004년부터 10년 동안 중앙 정부가 농업,농촌에 지원하는 투,융자 규모가 119조원이라고 한다. 이중 2008년까지 지원 규모는 51조원으로, 2004년부터 매년 8조4,000억원, 9조6,000억원, 10조7,000억원, 11조4,000억원으로 연평균 7.8%씩 증가하는 것으로 돼 있다. 투자는 정부가 직접 사업을 하거나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고, 융자는 갚는 것을 전제로 꿔주는 것을 말한다.

모두들 엄청나다고 입을 모은다. 겉으로만 본다면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1년 동안 농업,농촌 투,융자에 지원된 국고 62조원의 거의 두 배에 이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된 투융자계획은 과거와 달리 중앙 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금액만을 반영, 산정했다”는 농림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119조원에 감춰진 ‘수치놀음’을 차분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92~98년 투?융자 규모 42조원에는 국고지원분 35조4,000억원 이외에 지방비 3조8,000억원, 농민 자부담 2조5,000억원까지 포함, 전체 규모를 발표해 과대 포장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꼼수’를 피우지 않았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 별도 기획한 추가 투융자 없어
먼저 119조원은 기존에 계획된 투?융자사업예산 이외에 별도로 기획한 추가 농업 투,융자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정부가 2008년까지 5년간 지원하겠다는 51조원에는 생산기반안정자금 등으로 정부 예산에 이미 반영돼 있는 자금이 39조원이 넘는다. 곧 기존 예산에 반영돼 있지 않은 순수한 증액분은 11~12조원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전과 달리 순수한 국고만을 포함했다는 정부의 설명에도 ‘함정’이 있다. 일반 예산 이외에 기금이 23%나 들어있기 때문이다. 현재 농림부가 굴리는 기금은 농안기금, 농지관리기금, 쌀소득보전기금, 양곡증권정리기금, 축산발전기금 등 5개이다. 이들 기금의 운용 규모는 올해 7조3,000억원, 내년 6조8,000억원 수준이다.
게다가 기존 농림예산(농림부+산림청+농촌진흥청)만도 이미 10조원에 이른다. 2004년 농림예산은 10조1,051억원이다. 여기에는 채무상환 등 경상적 경비(3조2,000억원), 인건비 등 기본적 경비(1,800억원)가 포함돼 있다. 결국 농림예산에서 이들 경비를 빼면 6조7,000억원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2004년 투?융자액 8조4,000억원에서 1조7,000억원 정도가 모자라는 것이다. 모자라는 부분은 운용규모가 7조원 안팎인 농림부 소관 5개 기금에서 조달한다는 게 정부의 복안이다.

* 순예산 증액보다 농업기금에서 지원
결국 기존 예산에 반영돼 있지 않은 2008년까지 5년간의 투?융자 순수 증액분을 11~12조원 정도로 보면, 그 대부분을 농림부 소관 기금에서 충당하는 셈이다.
달리 말해, 이는 투,융자 순수 증액분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오히려 ‘기존 농림부 소관기금의 용도 확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실제로 2008년까지 투입되는 51조원 중 기금은 12조원이다.
실상이 이런데도 대통령과 정부는 마치 농업위기에 대비해 엄청난 농업?농촌 투?융자 사업을 새로 벌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92년 투?융자 사업을 과대 포장하는 발표를 할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정부의 11.11 농업농촌 종합대책 발표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7만~10만명의 농민이 상경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 반대와 농가부채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이런 ‘조삼모사’를 알지 못한다. 이런 식이다. “지금까지 … 농가에 대해 각종 명목으로 자금을 투입해 왔지만 실제로 유효하게 사용되지 못한 측면이 컸다는 점에서 이번 대책에서만은 ‘쏟아 붓기식 지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이후 76조원 이상의 예산을 쏟아 붓고도 우리 농업은 낙후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며 국제적으로 개도국 지위를 구걸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매일경제 11월12일치 사설 ‘쏟아 붓기식 농가 지원은 안 돼’)

* 농산품 대상 양허안 전략 바꿔야
투,융자 규모의 과장은 ‘농업 부문에서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라는 지상과제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중앙일보> 11월20일치에 실린 양수길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 대사의 칼럼 ‘농정개혁, 고정관념을 깨라’는 이를 암시한다. 그는 “만약 그(이번 대책의) 운영방향도 옳게 잡히고 또 운영이 실제 효과적으로 이뤄진다면 한-칠레 FTA의 발효는 우리나라 농촌의 만성적 위기를 해소해 나가면서 동시에 국내 농산물 시장도 점차 개방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개도국 지위를 구걸하지 말자는 것이다. 방법은 있다. ‘과장된’ 정부의 이번 대책을 통해 농촌 구조조정이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10년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때까지는 공산품 분야에서 양허안을 만들어내면 된다. 농산품 분야에서 양허안을 만들어낸다는 협상의 기본전략을 바꾸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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