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밑으로 흐르는 내린천 물이 조금씩 조금씩 얼음을 녹이고 있는 소리가 들리니? 봄이 오는 소리야.” “자… 가만… 대이팔에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나 좋구나.”
홍역 앓듯 스물아홉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삼십이립(三十而立)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난 주체할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기지 못하고 오지 중에 오지 강원도 홍천군 내면 창촌리 살둔산장으로 기어들어갔다.
‘살둔’은 월둔, 달둔과 함께 예언서 정감록에서 난리를 피해 숨을 만한 곳으로 꼽는 3둔의 하나로 생둔(生屯)이라고도 불린다. 살둔의 ‘둔(屯)’은 산기슭의 펑퍼짐한 땅을 가리키는데, 산장지기 이상주 선생님의 말씀을 빌자면 넘어가는 ‘언덕’이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둔덕’의 의미다. 그러니까 ‘살둔’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능히 쉬어 ‘기댈’ 수 있는 포근한 땅이다.



살둔산장 근처에는 해발 1,200~1,400m 되는 방태산, 개인산, 계방산 등이 있어 바깥으로 쉽게 노출되지 않는데다 내린천 물이 흐르고 경작 가능한 땅도 제법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갇혀있는 듯하지만 갇혀있지만은 않은 곳이다.
산장은 통나무를 귀틀집 방식으로 올려 튼튼하고 한지를 2겹으로, 가운데 단풍잎을 은은하게 넣은 문은 고풍스럽다. 조금 삐걱거리는 계단을 오르면 2층 다락방인데, 사방 창문을 통하는 바람을 베고 자는 곳이라 하여 침풍루(寢風樓)라 부른다. 계단 한 쪽 손잡이는 아예 긴 통나무인데, 거기에 새겨진 문구를 찾아내는 일도 흥미롭다. 함석지붕이라 여름에는 실내가 더울 것 같지만 안으로는 피나무 껍데기를 잘라 붙였고, 그 사이사이 진흙을 발라놓으니 열기가 들어올 틈이 별로 없다.
본채 말고도 취사를 하거나 겨울 밤 군불 때며 그윽하게 술 한 잔 걸칠 수 있는 부엌이 있고, 내린천으로 내려가기 직전 키 작은 산죽들이 서로 부딪혀 소리 내는 양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바깥채가 있다. 또 이상주 선생님의 보물과도 같은 2만여 장서가 꼼꼼하게 분류된 도서관 같은 방이 3개 더 있다. 두어달 머물 때 나는 책 내음을 베고 매일 잠을 잤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내린정이다. 무슨 정자 이름 같지만 실은 화장실이다.
“내리는 것이 어찌 내린천 뿐이냐? / 비도 눈도 이슬도 내리고 /…/ 비우고 / 채워서 내린다. /…/ 다들 내린다 / 주거니 받거니 내린다.“ 이상주 선생님과 오랜 지인인 성균관대 박승희 교수님의 솜씨다. 김훈이 극찬하던 선암사 화장실 말고도 내린정에 앉아 이 시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살둔산장과 이상주 선생님은 나의 충분한 둔덕이 돼 주었다. 가끔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라든지, 온갖 곳에 떨어지는 빗소리 중에 대이팔에 떨어지는 소리를 가려내라든지 하는 어려운 숙제를 내주시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제 도로도 다 뚫리고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정감록의 얘기는 단지 과거가 됐을 뿐이고 TV는 물론 라디오도 제대로 안 나오던 곳에 스카이라이프도 달려 문명과 ‘접속’하려는 걸 보니 안쓰럽기까지 하다.

◆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속사나들목을 빠져나간 다음 운두령 고개를 넘는다. 홍천군 내면 창촌리에서 56번 국도를 타고 삼봉자연휴양림 방면으로 오르자면 광원리가 나타난다. 이곳의 신선타운 휴게소에서 좌회전하면 살둔마을에 갈 수 있다.
◆숙 박 : 살둔산장(033-435-5928)

이정희 기자(goforit@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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