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옥 본지 논설위원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
sparkcti@hotmail.com


발문
중요한 것은 서로가 상대방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영 쪽에서 먼저 불투명했던 경영을 투명하게 함과 동시에 권위적인 관리자들의 마인드가 비권위적으로 변화될 때만이 노동자를 변화시켜 진정한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다.

16일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 곽재규 열사는 곽재규 열사의 딸 경민이가 아빠에게 눈물로 보내는 애절한 편지와 함께 외롭고 고립된 공중의 크레인에서 깊고 캄캄한 절망속의 도크에서 해방되어 모든 쇠사슬을 벗고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죽기 전에 전국의 노동자들이 달려왔더라면 이 두 열사를 하늘나라로 보내지 않고 가족의 품으로 보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부끄러움과 자책이 되어 경민이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게 한다. 이제는 여하를 막론하고 더 이상 노동자를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빼앗아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도 기업도 정부도 사회도 반성과 각오를 다시 한번 다짐하고 지켜야 할 약속이고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위해서 요즘 손해배상 가압류와 비정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해법과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뜨거운 공방전과 논쟁으로 아직까지도 노사양쪽이 서로의 입장만을 내세우면 팽팽하게 대립관계로 맞서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노동조합에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작업장의 질서를 확립해야 회사가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그 파업의 원인은 기업이 제공하고 있고, 결과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시켜 전체 손해를 노동자 개개인에게 떠넘겨 손배 가압류라는 쇠사슬로 묶어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노사간의 불신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전태일 동지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고 인간” 이라고 선언한지 33년이 지나도록 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직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한국 노사관계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가, 노사 모두에게 양보와 포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신의 골이 더욱 깊어져 결국 폭발하는 사태까지 오고만 것이다.

33년 전과 오늘,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87년 이후 노동자의 삶의 조건과 노사관계가 질적으로 양적으로 발전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은 노동의 가치와 노동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명한 학자가 말하지 않아도 노동자는 ‘살아가기 위한 그 수단’으로 노동을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21세기 한국 노동자들이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겼다고 푸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들에게서 노동할 권리와 노동의 의미까지 박탈당하는 것(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사회와의 연대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소외감과 박탈감에 있다고 보여진다. 청소부로서 시민을 위해 거리를 청소하든, 옷 공장에서 옷을 만들든, 배를 만드는 노동자라도 좋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이 인정되고 존중되어지기를 기대할 것이다. 오직 그 양에 의해 평가되어지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천시하는 한국사회적 통념에 그 원인이 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별받는 것은 노동자의 인간소외와 노동이 천시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처사는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으로 결국 노동자들을 대책 없이 비정규직으로 몰아내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이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는 손배 가압류로 생존권을 위협받아 벼랑 끝에 몰린 절박한 상항이 바로 노동자들에게는 극한적 투쟁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의 소외감을 불식시키고 노사가 서로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노사간의 불신을 해소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적 노사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다.

얼마나 더 유연해져야 만족하겠는가

현 노동국면에서 손배가압류와 비정규직이 가장 뜨거운 이슈이다. 참여정부 들어 새롭게 등장한 이 문제는 이전 군부독재 정권 시절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손배가압류가 발동되지 않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불법 파업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는 노동자들이 왜 파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고, 노동자들이 잇달아 목숨을 끊은 심각성에 정부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노동탄압이 없는 척, 친노동정책을 쓰는 척 하면서 노동자를 훨씬 더 강한 손배 가압류, 비정규직이라는 쇠사슬로 묶어왔다. 법을 고치는 것도 이를 해결하는 한 방법이 되겠지만, 꼭 법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상호 신뢰 속에서 대화로 복잡하게 얽힌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 나가는 노력과 인내가 없다는 것이다.
외국 투자가들은 노동시장 유연화의 필요성을 요구한다고 정부나 기업은 기회만 있으면 강조한다. 56%가 비정규직인 한국 노동시장은 얼마나 더 유연해져야 기업이 만족하며 투자할 수 있는 것인가. 비정규직 중에서 그래도 좀 괜찮다고 하는 공공부분 비정규직을 보면 정규직에 비해 50~70%의 임금을 받는다. 같은 시기에 입사하여 옆자리에 나란히 않아서 같은 종류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받고 있다.
선진국에도 비정규직이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태에서 비정규직으로 전락되는 것이 아니고 가정과 직장을 겸하기 위해서 오히려 스스로 비정규직을 택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영국과 한국의 비정규직을 보면 이 두 나라의 비정규직은 그 차별에 있어 비교할 수 없다. 영국은 사회보장제도라는 사회적 안전망이 노동자의 기본권을 지켜주고 있다. 교육(사교육비 문제가 없음), 의료(완전 무료)와 주택문제가 절대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반면, 한국의 비정규직, 영세사업장노동자는 4대보험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상태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모순을 더욱 심각하게 하는 요인이 될 뿐이며, 빈부격차를 만들어 내 사회 불안을 높인다.

노동자를 진정한 ‘경영파트너’로 인정해야

한국 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한방에 다 해결할 수 있는 마술의 해법은 없다. 다만 이제는 기존의 적대감을 없애야 한다. 그렇게 하기위해서,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인 쪽에서 노동자들을 진정한 경영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노사가 함께 공존하는 평화적인 노사문화를 만드는데 선구자가 될 용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필자의 연구과정에서 조사한 한 기업에서는 경영 쪽이 먼저 양보하고 함께하려는 노력을 보여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만들어 낸 사례가 있다. 회사의 최고 경영인을 비롯해서 관리자들이 먼저 마음을 비우고 노동자를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노동자도 변화할 수 있었고, 노동자 스스로가 생산의 주체로 참여하게 되고 결국 생산성 증대로 귀결됐다.
어느 한쪽이 하고 싶다고 일방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상대방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업의 사례에서 중요하게 지적되는 것은 경영 쪽에서 먼저 불투명했던 경영을 투명하게 함과 동시에 권위적인 관리자들의 마인드가 비권위적으로 변화되었을 때 노동자를 변화시켜 진정한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노사 양쪽이 자신의 입장과 이익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목소리가 되어 서로가 듣지 못하는 허공의 외침이 더 이상 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도 노동자가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노동자도 기업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원칙만 서로 확인된다면 노사상호 신뢰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가 행복해질 때 자신이 하는 일에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기업도 번영되고 경제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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