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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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
노사분규든 노동쟁의든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을 줄이는 길은 노동자의 자제나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밝은 전망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데 있다.


노동관계 글을 읽다 보면 헷갈리는 말들이 더러 있다. 쟁의행위와 노사분규가 그 하나이다. 둘 다 노사간의 다툼인 듯한데 말하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서로 달라 혼란스럽다. 그 속내야 따로 있겠지만 대체로 정부나 자본 쪽은 노사분규라 부르는 것 같고 노동진영에서는 노동쟁의 또는 쟁의행위라고 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노동쟁의란 노사간에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해 주장이 맞지 않아 생긴 분쟁상태이며 쟁의행위란 노사 당사자가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가로막는 행위이다. 그에 비해 노사분규란 개별사업장에서 8시간 이상 파업이 발생했을 때를 뜻하는 것이라 한다. 쟁의행위는 법률상 이름이고 노사분규는 노동부가 나름대로 뜻을 붙인 행정상의 용어인 셈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자본 쪽이 노사간 다툼을 법률상의 용어인 쟁의행위라 하지 않고 굳이 노사분규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은 합법쟁의와 불법쟁의를 구분하자는 뜻인 듯 싶다.
노사분규라는 말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1964년 중반이후 정부는 노동쟁의와 노사분규를 구별하고 있다. 노동쟁의는 법률상 정해진 절차에 따른 다툼을 뜻하고 노사분규는 그 밖의 노사갈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오면 노동쟁의는 법전 속으로 숨어버리고 노사분규만이 자리 잡는다. 1971년 말 박정희 정권이 국가보위법으로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박탈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노동쟁의는 모두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노동자의 저항행위는 모두 노사분규라고 불렀다. 이 말에는 다분히 노동쟁의를 불온시하거나 거부하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노사분규는 불법 노동쟁의의 다른 이름이거나 노동쟁의를 불법화한 대용물이었다. 그 후 1980년대에 정부는 다시 노동쟁의와 노사분규를 구분하지만 1987년 노동자대항쟁 이후로는 노사분규로 통합하여 부르고 있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단체행동권의 행사가 어떤 이유에 의해 불법쟁의로 규정되는지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참고로 2000년 이후 3년간 불법분규는 20% 수준이고 매년 줄어들고 있다.

쟁의증가에 대한 잘못된 진단

올 들어 노동쟁의가 13년 만에 가장 많아질 것이라고 한다. 노동부에 의하면 11월 13일 현재 노사분규는 305건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의 287건에 비해 6.3% 늘어났는데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의 대규모 집회가 예고돼 있어 올해는 90년 이후 가장 노사분규가 많이 일어날 전망이라는 것이다.
1990년과 지난해에 일어난 노사분규는 322건이었다. 올해 노사분규에 참가한 노동자수도 13만1,56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9만1,500명보다 43.8%나 늘었고 다만 근로손실일수는 124만3,128일로 지난해 150만293일보다 17.1%줄었다. 정부 통계로 보면 쟁의행위는 외환위기 이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노동자대항쟁이 일어난 1987년 3,749건을 고비로 매년 줄어들어 1997년에는 78건에까지 감소하던 것이 매년 늘어나 올해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노동쟁의 급증을 우려한 보수언론들은 그 배경을 대체로 이렇게 분석한다. 곧 노무현 정부가 친노정책을 표방하여 노동계의 기대감이 높아졌고, 산별노조 전환으로 연대파업사업장이 많아졌으며 새 정부 출범 후 상당기간 동안 불법파업에 대해 법과 원칙 대신 대화와 타협을 내세우는 등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친 것이 분규를 부채질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적은 오로지 참여정부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보수기득권 세력의 관점을 반영한 것일 뿐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절박함을 전혀 무시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내용은 정부가 집계한 쟁의행위의 원인에 잘 나타나 있다. 오랜 동안 대종을 차지해오던 임금인상은 1990년 전체 322건 중 167건에서 2002년에는 44건으로 매년 줄어들고 그 대신 단체협약이 49건에서 249건으로 급증하고 있다. 여기에 구조조정을 포함하면 그 비중은 훨씬 커진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임금인상에서 고용안정과 권리확보 등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곧 대다수 노동자들은 경쟁력 강화와 경영합리화라는 명분 아래 가해지는 고용불안과 지배통제 강화에 대응하여 최소한의 생존조건을 보장받기 위해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자본은 강성노조 때문에 파업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거세게 몰아부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노조운동을 왜곡시키거나 노동대중의 의식수준을 무시함으로써 결국은 노동자들의 울분만 키워줄 뿐이다. 노동쟁의가 증가하는 것은 강성노조 또는 노조원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조건 곧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들이 소외받는데서 비롯되고 있음을 저들은 한사코 묻어두려 하는 것이다.

노사관계 변화를 위한 인식의 전환

정부와 자본은 노사분규를 없애야 한다고 역설한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요구를 자제하고 공생의 원리, 윈윈전략을 위한 신노사문화 창조를 위해 스스로 협력과 참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동자들 역시 회사 잘되기를 바란다. 투쟁지상주의가 노사관계의 발전과 노동운동의 역량축적에 이롭지 않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쉽사리 정부와 자본의 주장을 수긍할 수가 없다. 노동자를 둘러싼 상황들이 너무도 모순에 차있기 때문이다. 정년은 고사하고 오륙도, 사오정도 모자라 38선으로 풍자되는 살벌한 고용위기, 비인간적 차별과 고용불안에 신음하는 비정규직노동자가 절반을 훨씬 넘었는데도 보호는커녕 노동의 유연화가 더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받는 조류, 98년 이후 1,000여명의 노동자 구속에 부당노동행위 기업주 구속은 단 2명으로 비견되는 불평등 극치의 법치주의, 수백 수십억씩 빼내고 불법정치자금 갖다 바치면서 임금동결, 정리해고 고집하는 기업풍토, 노조와 노동자의 생계를 질식시키는 손배 가압류가 서슴없이 자행되어 끝내는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가도 법과 원칙만이 철칙이라고 강조되는 분위기,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의 민주화 11년 동안에도 끊임없이 증가하는 부당노동행위와 기업주의 노조적대행위, 기업주가 합의를 이행하지 않아서 파업을 하면 불법이 되고 부당노동행위 구제명령을 어겨도 제재수단이 없는 제도, 노동쟁의와 관련하여 노동에 대한 규제가 훨씬 많은데도 경영대항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해괴한 노동개혁이 공공연히 강조되는 정책환경 등등, 예를 들기도 숨 가쁜 이런 조건하에서 신뢰관계의 구축은 겉돌 수밖에 없으며 노동자들 스스로 자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이기를 포기하라는 것과 진배없는 것으로 노동자들은 인식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 일들을 개혁하자면 시간이 걸릴 테니 기다려달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자제할 것이며 자제의 결과는 어떤 것인지, 또 기다린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다리면 잘될 것이라는 가능성과 전망을 눈에 띄게 내보여야 한다. 장밋빛 환상만 보이면서 나를 따르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책과 조치를 노동현실 개혁으로 직결시킴으로써 발전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사분규든 노동쟁의든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을 줄이는 길은 노동자의 자제나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밝은 전망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데 있음을 앞서간 나라들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애써 외면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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