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상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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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연장이 ‘세대간 착취’란다. “관점이 있는”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박태견 편집국장의 주장이다. 그는 지난 11월10일 “정부, ‘세대간 착취’ 추진을 즉각 멈춰라”란 제목의 데스크칼럼에서 “사무직의 명퇴 연령이 36살로 조사될 정도로 민간부문의 구조조정은 살벌한 지경”이고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고를 기록하는 상황에서 기성세대의 정년 연장은 곧바로 청년세대의 실업률 증대로 나타날 것”이라며 “정년 연장은 고령층 취업난의 해법이 아니다"고 밝혔다. 수혜 대상이 공무원이나 공기업 임직원들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재정경제부가 정년 연장을 제안한 동기의 순수성이 의심스럽다는 의혹도 제기한다.

* ‘세대간 착취’ 위험한 낯익은 논리
매우 낯이 익은 논리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직후,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단체이던 자유기업센터(현 자유기업원) 소장 공병호씨(요즈음 공씨는 어린이를 위한 경제책을 쓰고 있다)가 ‘자유로운 정리해고’를 외치며 내세웠던 게 바로 ‘세대간 착취’였다.
박 국장은 “25년 뒤 미래세대에게 한 푼의 혜택도 못 돌아갈 위험이 높은 국민연금 부실화 문제” 역시 ‘세대간 착취’의 한 사례로 꼽는다. 지난 10월14일 법인세를 아예 폐지하자는 과감한 주장을 펼쳤던 최광 한국외국어대 교수를 포함한 경제학자를 중심으로 한 교수 302명으로 구성된 ‘국민연금 살리기 운동본부’가 ‘후세대를 위한 국민연금 개혁’을 내세우는 논리에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
박 국장은 정년 연장이 ‘세대간 착취’이자 ‘관료주의’라는 “철밥그릇에 방탄기능까지 보완하려는” 시도라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녹록치 않은 과제인 만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점만은 밝혀둬야 하겠다. 재경부는 지난 11월9일 ‘인구 고령화의 현황 및 정책대응방향’에서 정년 연장만을 제시한 게 아니다. 고령자의 계속고용을 위해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임금 인상을 제한하는 이른바 ‘임금피크제’도 함께 제시했다. 정년 연장을 공무원만을 위한 ‘철밥그릇에 방탄 기능 입히기’라는 박 국장의 비판이 협소하다고 판단하는 이유이다.

* ‘정년’과 ‘일할 권리’ 분리 안 돼
우리나라에서 ‘정년’은 일할 권리와 분리할 수 없다. 고령자고용촉진법에 ‘권장사항’으로 법정 정년을 60살 이상으로 해놓은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권장사항일 뿐이다. 지난해 직장을 떠난 노동자 304만명 가운데 정년 퇴직자는 0.37%(1만2,000명)에 불과하다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반면, 노동시장을 떠나는 실제 정년은 매우 높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68살로 30개 회원국 가운데 네 번째로 높단다. 실제 정년과 법정 정년, 아니 조기퇴직 사이의 이런 엄청난 격차는 ‘일할 권리’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다.
현행 국민연금제도를 ‘세대간 착취’로 간주하는 박 국장의 관점에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김연명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중앙대 교수)은 △가족간 사적 이전을 통한 현 세대의 부모 부양 △적립식 국민연금의 속성 △98년 연금 수준 10% 인하 등에 비춰 현 국민연금 제도를 ‘세대간 착취’라고 규정하는 것은 협소하고 단순한 논리라고 비판한다. 연금보험료 40년 납부를 기준으로 소득대체율을 현행 60%에서 내년 55%, 2008년부터 50%로 내린다는 정부의 계획은 ‘장밋빛’일 뿐이다. 조기퇴직이 만연돼 있는 지금의 노동시장 상황은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 납부기간이 20년 정도밖에 안 된다는 현실에 반영돼 있다. 이럴 경우 현재 30% 수준인 소득대체율은 25%로 그야말로 용돈 수준으로 떨어진다.

* 세대간 통일전선의 상상력 펼칠 때
그럼 ‘네 대안은 뭐냐’고? 나는 ‘정년 연장’을 ‘세대간 착취’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한, 이미 미국을 훨씬 웃도는 국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더 높이라는 식의 궤변으로 귀결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고 생각한다. ‘일할 권리’라는 관점에서, 사기업의 정년을 최대한 보장하고 청년층 실업 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좌파 포스트케인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일자리 보장’(JB)이 그것이다. 이 제도는 일할 의사가 있고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언제든지 일정한 최저임금을 받고 공공부문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공공부문은 자본주의 경제의 경기순환에 대한 일종의 ‘완충장치’이다. 경기가 좋으면 사기업의 일자리가 늘어나 이 공공부문 취업자는 자동적으로 줄어들고, 경기가 나쁘면 자동적으로 늘어나는 식이다. 재원은 조세를 주축으로 하되, 대기업의 사내복지기금 등 각종 사회적 기금의 일부에서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그렇지 않다. 국민연금 제도를 개편하는 방향의 하나로 조세에 기반한 기초연금 제도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노후생활 보장을 위한 기초소득을 국가가 재정으로 지원하자는 얘기다. 이런 발상과 ‘일자리 보장’은 그리 멀지 않다. 지금은 ‘세대간 착취’의 논리가 누구에게 봉사하는 것인지 따져보고, ‘세대간 합의’나 ‘세대간 통일전선’의 상상력을 펼칠 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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