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기 세종문화회관노조 서울시극단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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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비슷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다르게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점심시간에 어느 식당으로 갈까를 고민하는 사람과 집에서 싸 준(혹은 싸 온) 도시락을 꺼내는 사람은 누가 봐도 다르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내가 하는 것과 타인이 하는 것은 작업방식도, 작업결과도 다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삶의 형태들은 서로가 다른 것일 뿐 누가 맞고 틀린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틀렸다'라는 말을 한다. 과연 '틀렸다'라는 말이 맞는 것일까?
가곡 중 '비목'이라는 노래를 성악가가 부르는 것과 가수가 부르는 건 분명 다르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노래에 접근하는 시각(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악가는 악상기호(음정, 박자, 셈여림 등의 표시)를 먼저 보지만 가수는 가사와 거기에 따르는 느낌을 우선시한다. 물론 양쪽 모두 그것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중요도의 순서일 뿐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예술에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는 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다. 너무도 당연하기에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연극을 크게 희극과 비극으로 나눠 보자. 오늘 저녁 당신에게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공연을 보시오’라고 한다면 과연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특별한 경우가 없다면 희극을 선택하지 않을까?
기독교의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던 중세 유럽에서는 희극을 악마로 취급했다. 이유는 ‘그리스도는 절대 웃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아마 성경에도 그리스도가 웃었다는 기록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중 유일하게 웃을 줄 아는 동물이다.
그럼에도 중세 유럽은 희극을 해서도 안 되고 희극을 봐서도 안 되는 시기를 보내야했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영화를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이전의 시기에는 웃음에 대해 ‘기지와 말장난도 진실을 드러내는 수단이며 웃음도 진리 전파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인간에게 불을 가르쳐 준 프로메테우스도 몰랐던 기술 즉 두려움을 감추는 기술이다’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렇게 웃음에 대한 시각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됐다.
그렇다면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 예술은 어떻게 표현될까?
웃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중세의 예술은 어둡고 탁한 분위기가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 웃음이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현실에서는 가벼운 모방의 형태가 수없이 행해지고 있다. 예술에서 상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새롭고 다양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자연주의 연극이 성행했던 19세기 중반에는 정육점을 표현하기 위해 도살한 가축을 아무런 처리 없이 무대에 올렸다. 공연 첫날은 생생한 그 느낌으로 모두가 환호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며칠이 지난 후의 일이다. 무대에 있는 가축이 썩기 시작한 것이다. 그 냄새와 모습을 상상해보자. 결국 그 공연은 가축을 빼내고 공연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무대기법을 틀렸다고 말할 것인가?
그 당시의 예술가들은 그러한 무대기법을 혁신적이고 희망적인 표현방법이라고 생각했건만… 오늘날 예술은 이런 모든 것을 수용하며 발전하고 있다. 다양한 것들 속에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대체로 인정하며.
주도권을 쥐고 있는 예술가들에게는 이러한 다양성이 달갑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것이 상대적으로 작아져 보일 수 있을 테니까. 예술은 스포츠와는 다르다. 스포츠에는 이기고 지는 것이 있다. 승리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인 것이다. 스포츠는 상대적이지만 예술은 절대 상대적일 수 없다. 예술은 예술가 자신이 만든 절대적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다.
스포츠가 예술보다 사랑받는 나라에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무척 힘들다. 우선 이겨야 하니까.
예술조차 이런 형태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예술 뿐 아니라 작금의 현실이 노동자나 농민이나 자본가나 서로가 인정받지 못하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개탄스럽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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