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본지 논설위원
한국사회민주당 대변인 winwinmaker@empal.com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긴 지 33년이 지난 현재, 올 들어 네 명의 노동자가 자결하거나 분신을 시도했다.
사실, 훨씬 이전부터 극한적 상황은 경고되었고, 대책이 촉구되었던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업재해로 하루 10여명이, ‘생계형’ 자살로 하루 30여명이 죽어나가는 등 총체적 ‘공동체 해체와 붕괴’ 현상을 다시 거론하지 않더라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제기했던 문제의식과 주장들이 제대로 관철되고 있는가, ‘노동자에게 있어 우리 사회는 과연 근본적으로 달라졌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답은 부정적이다. 죽어간 노동자들이 절규했던 것이 그 점이다.

33년 전과 오늘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노동문제가 잔여적(모든 것을 고려하고 난 후 마지막 변수로서의 노동), 치안적, 공안적 시각에서 여전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분규(법적 용어인 노동쟁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만 없으면 된다거나 아니면 경제에 걸림돌이 된다는 시각이다. 경제를 살리고 보자는 시각은 33년 전 ‘선 성장 후 분배’의 재판이다.
다음으로 노동문제의 총체성과 역사성, 역동성을 무시한 교조적 사고방식이다. 이제 먹고 살만큼 되었는데, 너무 하지 않는가, 도덕성이 없다, ‘노동귀족’이라는 등의 시각에서 발견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000억원을 숨겨놓고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정치권은 온통 검은돈 이야기로 밤을 지새는데 무슨 도덕성 타령인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이 바로 이들인데 누구더러 책임을 전가하는가. 현대자동차 노사가 자율적으로 임단협을 타결한 것은 현재의 조건에서 지극히 ‘합리적’이고 오히려 정부정책의 금과옥조인 ‘신자유주의적’(=많이 벌었으면 많이 줘야하는 것 아닌가)이기까지 한데 무슨 노동귀족타령인가. 또한 이들이 아무리 벌어도 교육비, 주거비, 의료비, 노후 생활보장 생각하면 걱정이 끝이 없는 것이 현실인데, 이를 무시하고 이들을 속죄양 삼는 것은 무능하며 부도덕하기까지 하다.

시대상황에 따른 노동문제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70년대는 ‘절대적 빈곤’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이 더욱 문제다. 또한 그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평균치’ 사고의 문제점이다.

이것은 노동자 내의 심각한 양극화를 의미하는데, 평균적으로 과거에 비해 소득수준이 높아진 것은 당연하고 또한 사실이지만 아직도 중소영세, 비정규 노동자의 경우는 상황이 아주 열악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올바른 대책이 나올 수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의 확충이 시급하다. 이것은 모든 국가와 정부의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책무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는 정권은 존립의 근거가 없다. 이를 위해 영미식 자본주의의 맹목적 추구와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는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둘째, 대표체계의 확립이다. 잘못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노동운동의 전투성 혹은 과격성이다. 일부 그러한 점이 없지 않지만, 전체가 아니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혹여 있을 수 있는 ‘전투성과 과격성’은 역설적으로 ‘힘이 없거나 강하지 않음’을 반증한다. 하루빨리 조직적으로 산별체제로의 전환을 촉진시켜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나 비정규직, 실업자 등에 대해서도 조직적 보호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정치적 대표체계의 확립이다. 하루빨리 노동자들 대표할 수 있는 정치체계가 힘을 갖도록 하거나, 기존 정치권의 대폭적인 혁파가 불가피하다.
결국, 오늘 같은 불행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 중 제대로 된 것은 즉각 시행에 옮기고, 잘못된 현실인식은 바꾸면 된다. 하지도 못할 약속으로 헛된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것만큼 죄악도 없다.
더 이상 자살과 같은 극한적 대응이 자제되어야 한다. 또한, 노동운동은 물론 정치권 그리고 정부와 재계 우리 모두 나서서 ‘고귀한 생명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비극적 상황’이 없도록 환골탈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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