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호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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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 “그렇다. 우리는 김주익을 살릴 수도 있었다. 우리는 과연 김주익의 그 철탑방의 129일의 시간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가?”

높이 100여m의 골리앗 크레인, 40m 위 운전실, 감옥의 징벌방보다 작은 0.5평의 129일의 그 나날들을 생각해 본다. 건너다보이는 태종대의 나무들이 막 연두를 벗고 초록으로 짙어가던 6월 11일 밤, 그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혼자 한 발 한 발 크레인 위로 올랐다. 마흔 한 살의 조선노동자, 아직 한 번도 ‘여보’라고 살갑게 불러보지도 못했던 한 여인의 아내요, 12살, 10살, 7살짜리 삼남매의 아버지인 껑충한 키의 멋쟁이 사내 김주익의 그 철탑방의 나날들을 생각해 본다.

새해 벽두인 1월 9일 두산중공업 노동자 고 배달호씨가 손배가압류에 못 이겨 스스로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으로 항거했지만 근본적 해결 없이 미봉으로 끝나 버렸다.
그때 이미 김주익 지회장의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도 손배가압류 7억 4천, 징계 8명, 해고 1명 등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철탑방에 오르며 그는 각오했다.

이 한진중공업의 전근대적이고 비상식적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노조에 대한 탄압을 목숨을 걸고 끝장내리라. 그는 오르면서 철탑방의 문을 잠가버렸다. 얼굴을 보면 혹시 마음이 약해질까 해서였다.

거의 190cm에 가까운 키를 누일 수도 없는 공간에서 그는 줄로 매달아 올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새우잠을 자며 투쟁을 독려했다.

지회장의 그러한 결단에 힘입어 한진중공업지회도 7월 22일 전면파업으로 강경 투쟁에 나섰다. 그가 올라가면서 투쟁 광장으로 변해버린 85호 크레인 앞의 마당을 그는 아침, 저녁 집회가 있을 때 마다 손을 흔들며 내려다보았다. 그 힘으로 투쟁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노무현 정권 8개월 실정의 목록들

2월 말에 출범한 노무현 정권도 8개월 째 접어들고 있었다. 큰 기대나 희망도 없었지만 노 정권은 점점 질곡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사회의 혼란과 절망은 극도에 달해가고 있었다. 취임 8개월 만에 이미 110명에 달하는 구속 노동자가 생긴 것이 웅변하듯, 노사문제에 있어서 노무현 정부의 입장은 분명했다.

노골적인 친자본 정책으로 돌아갔고, 심지어는 대기업의 노동자를 고연봉의 노동귀족이라고 몰아붙이며,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가장 큰 걸림돌로 매도하였다. 이런 대통령의 왜곡된 시각에 근거해 노동부는 사용자의 대항권을 강화하는 새로운 노사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어디 그뿐인가. 가족동반 자살이 연이어지는 350만 신용불량의 시대, 투기천국이 된 부동산 정책, 무너지는 농촌사회, 새만금 공사나 핵 폐기장 밀어붙이기에서 보여준 반환경적 정책, 남북관계의 후퇴, 방미 굴욕외교와 이라크 파병, 실종된 정치 개혁 등이 실패한 노무현 정권 8개월의 실정의 목록들이다.

또한 네이스 문제를 비롯한 철도, 화물, 새만금 등의 해결 과정에서 보여준 ‘아니면 말고’식의 말 바꾸기로 극단의 불신 사회를 정부가 조장하는가 하면, 등록금을 못내는 고등학생이 작년에 비해 2배나 늘어난 3만여 명에 이르는 등 부익부빈익빈의 사회 불평등 구조가 심화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김주익이 살고 싶었던 세상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자살은 극도의 심리적 절망감에서 오는 자기 포기 현상으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행복하겠다’는 심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0.5평 철탑방 90일 만에 그는 유서를 썼다. 그가 내려다보았던 투쟁광장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한진의 사용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은 또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그는 유서를 썼을까. 정부는 또 어떤 모습이었기에 맑고 고운 영혼의 김주익은 절대절망 앞에서 온 몸을 치떨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가 이미 포기해버린 목숨을 더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의 편지였을 것이다. 전기장판과 녹물이 벌겋게 묻어있는 이불 사이에서 발견된 손때가 가득 묻은 세 아이의 편지, “ 아빠! 내가 일자리 구해 줄 테니까, 그 일 그만하면 안돼요? 그래야지 운동회, 학예회도 보잖아요. 다른 애들은 아빠 자랑도 하는데… 사랑해요”하며 가족 그림과 함께 보내온 그 편지가, 그 편지에 겹쳐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이 김주익의 죽음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으리라.

그리고 그는 25일이 지난 10월 4일 다시 유서를 썼다. 어떻게 보면 어떻게든 죽으려는 발걸음처럼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철탑방 아래의 사회를 향해 ‘정말 안 되겠어요? 이래도 안 되겠어요?’하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애원하며 바라보던, 그의 사랑하는 애들과 함께 살고 싶었던 김주익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모든 사람이 교육, 의료, 주거, 통신, 교통 등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여건을 평등하게 누려, 저마다 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사회, 인간의 물질적 부를 위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며, 인간이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유지하면서 생태계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 민중이 사적 소유라는 족쇄로부터, 나아가 모든 억압과 굴종으로부터 해방되어 민주적으로 참여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수평적 연대가 이루어지는 사회, 어린이, 노인, 장애인, 이주노동자, 외국인, 성적 소수자, 이견집단 등 누구라도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차별당하지 않으며 필요한 보호를 받고 또 각각의 개성이 존중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억압, 착취와 차별이 모두 사라진 해방세상.」 그 소박한 꿈이 그의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오히려 회사는 조선소 안에 그 동안의 피해액을 붙이며 조합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했으며, 경찰은 김주익 지회장을 비롯, 6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한편 공장의 공권력 투입설도 나돌았다. 드디어 회사는 10월 14일에는 새벽 2시께 85호 크레인 옆 4도크에 머물러 있던 완성된 선박을 빼돌려 버렸다. 조합원들은 허탈했고 힘이 빠졌다.

또한 총체적 난관에 봉착해 있던 노무현 대통령은 최도술의 대선 자금 비리 문제가 터지자 엉뚱하게도 재신임을 묻겠다고 국민들을 협박하고 나섰다. 그것을 둘러싸고 이후 보여준 정치권의 한심한 작태는 국민들을 짜증나게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나라당의 SK의 100억 비리가 터졌다. 직접 돈을 받은 최돈웅도, 당시 대선후보 이회창도, 대표 최병렬도 자기는 모르는 일로 한 푼도 안 받았다고 오리발을 내밀다가 며칠사이에 사실로 드러났다. 국민들은 절망을 넘어 분노가 폭발 직전까지 갔으나 그들은 모두 너무 뻔뻔스러웠다.

죽고, 또 죽는 노동자

그런 17일 새벽 김주익은 갔다. 두 번째 유서를 쓴 지 두 주가 지난 때였다. 그리고 그날 역시 수배 중이던 세원테크지회 이해남 지회장이 홈페이지에 유서를 남겼다. 그리고 1주일 만인 23일 분신했다. 그 이틀 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 조 아무개씨는 엔진룸 세척작업 중 유독물질에 질식하여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올 들어 8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안전관리가 소홀한 열악한 작업장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26일에는 집회 도중 또 한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분신했다.
김주익 열사의 주검 앞에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은 울면서 외쳤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이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라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이주노동자를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것입니다.”
단병호 위원장은 추모사에서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의 책임을 ‘한진 재벌과 노무현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이라고 분명히 했다.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일주일만 빨리 왔으면 살릴 수도 있었는데’ 라고 안타까워한 그 소박한 인간적인 토로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 우리는 김주익을 살릴 수도 있었다. 우리는 과연 김주익의 그 철탑방의 129일의 시간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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