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욱 본지 논설위원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초등학교 칠판에는 ‘떠든 사람’ 이름 적는 곳이 있었다. 일단 그곳에 이름이 올라간 아이에게는, 선생님이 등장하는 순간 공포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응징이 따르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가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주고 있었는지, 아니면 친구에게 맞아 대드는 과정에서 소란을 피웠는지는 관심대상이 아니다. 정적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떠든 사람’이 되기에 충분하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그곳에 항상 적혀 있는 이름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이다. 사회의 안정과 질서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경쟁력을 훼손하는 파업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가차 없는 응징이 가해진다. 여기에서도 이유는 문제되지 않는다.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왜 노동자가 129일째 40미터 고공에서 응답 없는 외로운 외침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는가. 누가 헌법상 노동3권을 ‘애원의 권리’로 전락시켰는가.

사실 우리나라의 노동관련 법제도 그 자체는 이제 와서 ‘노사관계 선진화’를 운운할 필요도 없이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다.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나아가 파업권까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는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제도를 운영하는 방식과 실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랜 민주화 투쟁의 역사 속에서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과거에는 구속과 처벌을 통하여 직접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파업권을 제약하였다면 이제는 손해배상과 해고 등 시민법을 통하여 세련되고 교묘한 방법으로 제약하고 있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02년에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액은 약 185억원, 가압류 액수는 688억원에 이른다. 가압류가 이루어지면 노동자 개인이나 그 가족만이 아니라 신원보증인에게까지 피해가 미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노동자가 겪게 되는 심리적 압박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노동자와 그 친지들은 신용불량자가 되고 노조는 활동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정부도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나름대로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 불법파업이 이루어진 경우, 신원보증인의 책임제한을 설정하고, 조합원의 최저생계 보장을 위하여 최저임금 또는 최저생계비를 임금의 가압류 대상에서 제외하며, 노동조합의 존속보호를 위하여 조합비 수입의 일정부분을 가압류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것이다.
요컨대 노동법이 아니라 시민법에 의해 손해배상책임의 범위를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정면에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대응은 불법파업임을 전제로 하고 난 뒤,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개인 책임의 일부를 제한하고자 하는 데 불과하다. 왜 파업이 항상 불법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칠판에 적혀야 하는가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면 대책도 올바로 나올 수 없다.

법원의 일관된 입장에 따르면 파업은 최후수단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에게 목적 달성을 위한 여러 가지 수단이 있을 때에만 파업이 최후수단이 될 수 있다. 그 수단이 모두 봉쇄되고 있다면 파업은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

판례는 합병, 영업양도, 정리해고 등 이른바 경영전권에 속하는 사항은 단체교섭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일관하여 판단하고 있다. 설령 단체교섭에서 명시적으로 ‘합의’를 한 경우조차 그 의미는 ‘협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리고 사용자의 단체협약 위반에 대해 항의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파업은 정당성이 없다고 한다. 결국 법원의 논리대로라면, 노동조합이 합법적으로 파업할 수 있는 영역은 임금인상 정도에 불과하고, 근로자의 생존이 달려있는 문제에 대해서 합법적으로 교섭하거나 파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원은 단체교섭 사항과 쟁의대상 사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사용자의 경영전권을 강화하여 주면 산업평화가 증진되고 경쟁력이 강화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법원의 기대와는 정반대이다. 법원이 대화에 의한 문제해결을 애당초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노동기본권에 대한 과잉침해와 과소보호를 일삼는 법원의 행태를 정면에서 문제 삼아야 한다. 헌법상 노동기본권을 ‘집단적인 애원의 권리’로 전락시킨 책임은 근본적으로 법원에 있다. 불법파업을 양산하는 근본원인을 시정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제도를 마련하더라도 노사관계는 지금 상태에서 한걸음도 나갈 수 없다.

법원이 그릇된 현실인식과 입장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다면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사법개혁은 노사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제는 왜 칠판에 이름이 적혔는지를 자상하게 물어주는 참다운 선생님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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