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그 사람은 단순한 추억거리일 수가 없습니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생명을 주셨다면 그 사람은 내게 노동자 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혁명을 계승할 것도 없이 승리하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들 승혁이. 어느새 10살이 됐다.



전 한미병원 김성란 위원장이 주저 없이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그 사람은 지금 서울아산병원에 누워있는 부산지역일반노조 송영수(43) 위원장이다.

8년 동안 그와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김성란 위원장은 "그를 떠올리면 언제나 똑같은 부피의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며 "그에게 배운 대로 살지 못하고 본 대로 실천하지 못하면서 적당히 비굴하게, 적당히 게으르게 살고 있는 나 자신이 언제나 부끄럽기만 하다"고 털어놓는다.

바로 그 사람, 송영수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21시간이 걸린 대수술을 받았다. 만성 신부전증에 간경화까지 겹친 송 위원장은 자신의 아내에게서 간을, 조카의 신장을 기증 받았다. 한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대수술이었으나 20년 넘게 걸어온 운동가의 '한길' 만큼이나 그는 굳건히 죽음의 장막을 걷어냈다.

"깨어나기 직전 꿈속에서 동지들과 한명, 한명 인사를 했어요.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누군가 '송영수 일어나' 하잖아. 눈을 떠보니 저승이 아니라 간호사더라구. 동지들 덕분에 다시 살았습니다."

수술한 지 7일만인 지난 5일 중환자실에서 회복실인 '무균실'(면회 불가)로 옮긴 첫 날, 송 위원장은 가장 먼저 부산지역일반노조로 전화를 걸어 더듬더듬 말을 힘겹게 이어가며 농담까지 섞어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 10년 만에 오줌을 누다
"선택을 해야 했다면 정말 많이 고민했을 겁니다. 서민한테 1억원이 넘는 수술비는 정말 쉬운 선택이 아니거든요."

5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난 송 위원장의 부인 최애심(37)씨는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진다고 말한다.

"지난 5월말부터 남편이 이상해졌어요. 오른쪽으로 가야 할 길을 왼쪽으로 가고, 10년 동안 한번도 실수하지 않았던 복막투석 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그리고 송 위원장은 결국 쓰러졌다. 아침, 저녁, 새벽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그는 자꾸 쓰러졌다. 6월6일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 송 위원장을 두고 담당 의사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 가족들 부르고 마음에 준비를 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 날도, 그 다음날도 죽음의 문턱을 넘지 않았으며 서울로 옮겨져 수술까지 받았다. 몸에 파이프를 달고 10년 동안 하루에 4번씩 투석을 하며 "수술하면 밤 못 샌다. 니가 일 못하면 책임져 줄래"라고 버텨오던 그가 결국 삶의 벼랑 끝에 이르러서야 겨우 수술대에 오른 것이다.

"수술은 잘 됐어요. 하지만 이식수술이라는 것이 앞으로가 더 중요하거든요. 몸 안에 다른 사람의 장기가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경과를 계속 지켜봐야 합니다." 간호사 출신인 부인 최씨의 근심은 송 위원장의 건강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이번 수술로 들어간 돈만 1억2,000만원이 넘는다. 일단 급한 대로 집 등을 담보로 잡혀 대출을 받고 빚을 얻어 병원비로 썼다. 그 결과 송 위원장 가족(부부 사이에 10살난 아들 승혁이가 있음)은 빚더미 위에 고스란히 앉아 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던가. 두 달간 입원을 해야 하고 향후 1년간 매주 서울로 통원 치료를 해야 하며 평생 면역 조절 등을 위해 약을 먹어야 한다. 통원 치료 기간 동안은 매달 2백만원 가까이 소요된다고 한다.

"답답하고 막막하죠. 그래도 수술을 받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거 아세요? 남편이 10년 만에 오줌을 누게 됐어요. 그 동안 하루 4번씩 반복되는 복막투석 때문에 소변으로 나올 액이 없었거든요. 가슴이 뭉클합니다." 어느새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다. 지금 송영수 위원장 몸 안에는 부인인 최씨의 간 가운데 65%가 이식돼 꿈틀거리고 있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복부 부분에는 큰 '십자형'의 칼자국이 선명하다.

*낮은 곳만 보는 노동운동가
'부산문화방송 계약직 노동자 형근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MBC에 들어와
일년에 4,200시간, 한 달에 350시간, 하루에 14시간 혹사당해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쪼그라들어 반똥가리 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무지 귀여운 우리 형근이…'

송 위원장은 MBC 계약직 이형근 씨를 만나던 날(2001년 1월께), 자신에게는 독약과도 같은 소주 2병을 몇년만에 마셨다고 한다.

"송 위원장은 교섭이든 조직이든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사람과 친해지기입니다. 1번을 만나던, 10번을 만나던 사람의 심장이 파악돼야 한다고 늘 말합니다. 그날도 MBC 계약직 얘기를 새벽까지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 정말 오랜만에 술을 마셨던 거죠. 그 동안 신부전증 때문에 술, 담배를 하지 못했는데…."

2년 동안 송 위원장과 활동하고 있는 부산일반노조 이경자 사무국장은 당시 "목숨 걸고 운동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다음날 송 위원장이 긁적거린 '계약직 노동자 형근이'라는 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송 위원장은 61년 부산에서 태어나 인하대를 나왔다. 81년 인하대를 다니면서 지하서클 활동을 하던 중 공안기관에 붙잡혀 물고문, 일명 '통닭구이' 등 온갖 고문을 당했으며 신부전증은 그 후유증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고문으로 '피오줌'이 상당기간 지속됐기 때문이다.

그의 학생운동은 고스란히 노동운동으로 이어진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87), 병원노련 부산지부 사무차장(88),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정책부장(96) 등을 거쳐 현재 부산일반노조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금 몸을 담고 있는 부산일반노조는 환경미화원, 계약직 노동자, 정화업체 종사자, 규모가 작은 공장이나 개인병원 직원 등 노동자 중에서도 '약자'로만 구성돼 있는 조직이다.

부산일반노조말고도 그의 손을 거쳐 간 노조만도 100여개에 이를 정도로 그는 탁월한 활동가다. 송 위원장은 그렇게 20년을 쉼 없이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 우리가 그를 살리자
부산 노동계가 자발적으로 '송영수를 살리자'는 운동에 나섰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너는 일찍 죽으면 안 되겠다. 송영수가 나의 후배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의 학교 선배인 한울노동문제연구소 하종강 소장만이 아니었다.

"후원 때문에 백병원에 갔습니다. 송 위원장에 대한 병원 식당아주머니들의 회고담은 다시 한번 가슴을 찡하게 했어요. 송영수를 아느냐는 말에 '94년 파업 때 무슨 일이든 다 되게 만들었던 사람 아인교?' 하면서 돕겠다고 선뜻 나서더라는 겁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바자회에서 오뎅, 떡볶이, 지짐을 팔아 모은 돈이 400만원입니다." 후원금 모금으로 동분서주했던 김성란 전 한미병원 위원장의 말이다.

부산 노동계를 중심으로 구성된 '송영수 동지 투병 후원회'도 지난달 29일 후원의 밤을 열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상경투쟁으로 후원회 차질을 예상했지만 15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 성황리에 끝났다. 이렇게 송영수 위원장을 위해 그 동안 아름아름 모금한 돈이 3,000만원을 조금 넘는다. 물론 1억원이 넘는 병원비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라는 액수다. 때문에 노동계의 관심이 절박한 시점이다.

수술을 마치고 입원 생활이 끝나면 송영수 위원장은 또 다시 선택하려 할 것이다.

치료를 잘 받을 것인가, 그만 둘 것인가.
하지만 이제는 송 위원장에게만 맡겨 둘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나설 때다.

송영수 후원 계좌 번호 : 부산은행 140-12-012822-8(예금주 이경자)
문의) 051-637-7463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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