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추천이 : 박희민(금융노조 주택은행지부 노사대책실장)

휴가철에 접어들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인적이 끊기고 문명의 이기와는 완벽하게 단절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그러한 꿈을 꾸는 경우도 있을 법하다. 물론 이런 생각을 현실과 일치시키기란 싶지 않다. 내 생각보다는 가족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고 어느새 문명으로부터 조금도 떨어질 수 없는 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떠날 수 없다면 여기 여전히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욕망을 채워줄 책이라도 이번 여름에 읽어보는 것도 괜찮은 짓거리다.
명백한 신념으로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주저 없이 선택한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수필 <월든>은 150년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작가의 놀라운 통찰력을 현대인에게 각인시켜주고 있다.
문장 하나, 문구 한 줄마다 현대문명에 대한 조롱이나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한 듯하지만 글 속에 함축된 작가의 내면세계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과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월든은 단순한 수필을 뛰어넘어 계시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작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문명 세상과 부딪치며 현대사회와 자연세계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자신에 대해 심각한 혼란을 겪은 듯하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은 문명 세상에 편안히 안착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다는 것일 텐데 결국 그는 자연을 선택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 했다.
<월든>은 바로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한 명백한 신념을 놀라운 통찰력과 뛰어난 지식으로 써 내려간 거짓 없는 그의 역사 중 일부라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그의 자연속 삶과 그의 주의주장은 어느 것 하나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고 적자생존으로 내몰린 현대 문명사회 일원들은 더욱 그러하다. 메마른 감정이 요동치고 그 속이 촉촉이 젖어드는 느낌은 단지 나만이 갖게 되는 지극히 개인적은 것은 아닐 것이다.
<월든>을 알기 전 현대 문명사회 일원이면서 소로우와 마찬가지로 문명을 거부했던 또 다른 인물을 알고 있다. 유나버머라 불려지던 시어도어 카친스키가 바로 그다.
나는 책을 읽은 내내 소로우와 유나버머를 교차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둘의 차이는 단지 소로우는 자연에 순응하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굳이 달리 표현하자면 소극적인 방법으로 문명사회를 일깨워 주려고 했다면, 유나버머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문명에 대해 경고했다는 것이 둘의 유일한 차이가 아닐까 싶다.
150년전 소로우는 "동물들은 먹을 것과 몸 둘 곳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점잖게 얘기한, 반면 유나버머는 폭력을 동원해 현대적인 인간의 삶을 뒤엎으려 했다.
소로우는 노동을 즐기며 했고 독서와 자연에 빠져 사색에 잠기는 즐거움을 잔잔하게 표현했다. 현대문명이 발달할수록 생존을 위해 벌레처럼 노동하고, 남을 누르기 위해 독서하고,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사색이 곧 퇴보를 의미하는 현대인에게 소로우는 진정 신비하고 동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로우를 동경하며 살면서도 결코 현대인은 소로우가 될 수 없다.
문명과 한시도 떨어져 지낼 수 없을 만큼 이미 문명에 익숙해져 있고, 거미줄과 같이 촘촘히 만들어진 연을 끊을 수 없다. 어쩌면 언제가 꿈이 현실로 이뤘을 때를 대비해 당장은 당황하지 않을 만큼의 애정을 키워 가는 것에 만족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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