줏대도 없고 철학도 빈곤하여 중심 없는 시계추 운동을 벌이던 얼치기 개혁 정권이 급기야 공권력을 동원하여 파업 철도노동자들을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노 정권의 시계는 미래로 나아가지 않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듯, 토론과 참여, 대화와 타협을 강조해온 그들 스스로 토론과 참여,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힘의 논리로 무장한 권위주의 정권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정권이 좋긴 좋은 것인가 보다. 파업을 불러일으켜도 정권은 책임을 느끼기는커녕 ‘불법 파업, 엄중 대처’를 떠들어댈 수 있으니 말이다. 노 정권은 “향후 철도 개혁은 철도 노조 등 이해 당사자와의 충분한 논의와 공청회 등 사회적 합의를 거쳐 추진”한다는 <4-20 노정 합의>를 스스로 파기했고 또 파기했음을 시인했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공권력을 휘두를 권리만 있을 뿐, 그 어떤 책임의식도 찾을 수 없다. 네이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네이스 파기 약속을 스스로 뒤집은 정부에선 책임지는 자가 없는 반면, 그런 정부에 항의하면서 정보인권 보장을 요구한 전교조의 지도부에 대해서는 체포 영장을 날리고 있다. 권위주의 정권이 딴 데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개혁 정권이라면 사회구성원들의 참여를 통해 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것은 당연히 토론을 요구한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가는 민주적 과정을 토론이라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노 대통령처럼 “노사분규 건수도 작년보다 줄어들고 있는데...기삿거리 큰 게 없으니까 노사분규만 쓴다”고 수구신문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게 아니라, 노사 합의를 이루도록 정부가 앞장서 대화와 토론에 성실히 임해야 하는 것이다. ‘토론공화국’이라면서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여 노사분규를 불러일으킨 뒤 공권력을 동원하여 노사분규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으니 얼치기 개혁정권이란 말조차 부끄러워 할 지경이다.

실상 노 대통령의 얼치기개혁성은 전교조 교사들의 반전평화수업에 대해 딴죽걸 때 이미 확인되었다. 미국에 대한 우리의 처지가 ‘동네 깡패의 바지가랑이를 기어 들어가야 하는 한신의 처지’와 같다면, 그와 같은 조건과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마땅하며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구성원들의 올바른 대미인식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전교조 교사들에게 ‘반미’ 딱지를 붙이며 비난했다. 그렇다면 그는 다른 날도 아닌 3월1일날 “우리는 주한미군을 사랑합니다”라는 현수막을 자랑스럽게 내건 ‘시민’들의 대통령이기를 바라는 것인가.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 사이의 긴장과 함께, 현 단계 대중의 의식과 끊임없이 긴장해야 한다. 노 정권은 다만 수구신문들과 긴장하고 있을 뿐인데, 그것으로 개혁성이 담보되는 양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노 정권의 얼치기성은 다시금 확인된다. 개혁세력의 비판에 대해 노정권은 바로 수구신문들의 화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518 행사 때 한총련 학생들을 ‘난동자’로 몰아붙인 것도 그렇거니와, 노동자들이 집단이기주의로 파업을 벌인다고 보는 태도도 수구신문들의 논조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또한 파업의 원인을 따지기보다 파업의 부정적 결과만을 부각시키는 점도 그렇다.

이 세상에 파업을 하고 싶어서 하는 노동자는 없다. 노 정권은 당장 공권력을 풀고 노동자들이 왜 파업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말로 따져라. 그리고 파업노동자들과 토론을 벌이라. 공권력은 논리가 부족한 정권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노정권의 개혁 의지를 아직 믿고 싶어서다. ‘수구’ 대신에 얼치기나마 ‘개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러나 알아야 한다. 얼치기 개혁은 개혁세력을 분열시키고 전열을 와해시킨다는 점에서 수구보다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