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한달 전까지만해도 꿈도 못꿨죠."
8월의 세 번째 토요일인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김진영(가명. 26세)씨. 그는 10여명의 동료들과 막 축구를 끝낸 탓인지 가쁜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함께 뛴 듯 훌렁 웃옷을 벗어 땀을 식히는 약관의 나이를 갓 넘겼을 법한 청년들을 "같은 회사 조합원"이라고 소개한 그는 이런 주말의 '공놀이'가 왜 한달 전까지만해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씨와 그의 동료들은 모두 병역특례자로서 성동구 소재 삼일코리아라는 콘센트용 플러그 생산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김씨는 이들 중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고 나머진 스물 한, 두 살이 대부분이다. 모두들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은 뒤 군복무 대신 짧게는 7, 8개월, 길게는 2년 가까이 일해 온 것이다.
그러나 말이 좋아 '신의 아들'이란 병역 면제이지 그들의 직장 생활은 거의 '노예생활'과 다를 게 없었다.
"일주일에 나흘 동안 의무적으로 잔업을 해야 했습니다. 각서를 썼거든요. 까짓, 군 면제를 받게되니까 '꾹' 참자고 맘먹은 거죠. 그런데 이렇게 한달 뼈 빠지게 일해 받는 월급이란 게 고작 40여만원인 거예요."
병역 면제라는 '고지 탈환'을 위해선 어떤 어려운 일도 참고 견디겠다고 다짐했지만, 참기 어려운 근로조건이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애초 입사할 땐 퇴직금 없이 시급 3,000원을 주겠다고 약속한 회사가 실제 지급한 급여는 근무 연수에 관계없이 기본급 27만원에 특별수당 명목의 15만원이 전부였다. 주4일 동안 하루를 빼놓지 않고 시간당 1,960원을 쳐주는 잔업을 해도 이런 저런 세금 등을 빼고 실제 손에 쥐에 되는 월급은 45만원 안팎이었던 것이다. 입사한 지 3개월 동안은 실습생이란 이유로 25만5000원밖에 받지 못했다. 말이 상여금이지 생색내기로 근무한 지 1년이 지나야 겨우 290%를 지급한다고 했다. 점심 식대도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게다가 국경일도 거르기 일쑤였으며 근무시간은 오전 7시 40분부터 오후 5시까지로, 점심시간 50분을 빼면 실제 근로시간은 8시간 30분이지만 회사는 8시간 분의 임금만을 줬다는 것이다.
"벼룩의 간을 내먹으라는 속담 있지요? 바로 그 경웁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조금이라도 더 일을 시켜 먹으려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게 해요. 또 욕은 왜 그렇게 많이 하고, 사람을 '툭툭' 칩니까? '병특(병역특례자의 속칭)'은 사람으로도 안보이나 봐요." 말을 맺은 김씨의 직장 동료 최인상(가명. 22세)씨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처음엔 '군 면제를 받으면 그만이다'란 생각에, 또 '그 동안 일해 온 게 몇 개월인데 조금만 더 참자'란 마음으로 견뎌왔지만 '기아'임금과 장시간 노동은 이윽고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지난 5월 상순께 김씨 등 몇몇 '병특'들이 "뭔가 해야 한다"고 뜻을 모아 수소문 끝에 서울동부지역금속노조를 찾아 '반격'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씨의 얘기다. "한 달쯤 지나니까 전체 병특 20명 가운데 15명이 노조에 가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노조에서 교육도 받고 서로들 얘기도 많이 나눴죠. 그런데 7월 들어 회사 간부들이 우리 동료들에게 욕을 하고 손찌검을 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는 거였어요. 조합원들 사이에서 '더 이상 가만히 있으며 안되겠다'는 분위기가 확산됐고, 결국 행동에 옮긴 거죠."
'디-데이'는 7월 10일 점심시간이었다. 조합원들은 약속 장소인 공장 맞은 편 놀이터로 모였다. "병특도 노동자다, 노동자 권리 인정하라!" 구호를 외치고 노동가를 부르며 집회를 가진 뒤 회사쪽에 노조 가입 사실을 통보하고 정식 교섭을 요청했다. 회사 간부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직원 가운데 병특이 절대 다수였고, 전원이 노조에 가입해 있으니, 회사쪽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았어요. 또 워낙 장시간 노동에 임금 착취가 심했던 터라 회사쪽에서 구린 게 많았구요. 교섭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습니다."
동부금속노조 류치건 조직부장은 교섭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7월 13일 이후 2주간 동안 6차에 걸친 교섭에서 병특 노동자들은 노조활동을 인정 받고 고용안정 협약을 체결했다. 또 함께 일하는 9명의 아르바이트 아주머니들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 노동계의 주요 이슈인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해 냈다. 임금은 기본급을 50만원으로 하고 상여금을 400%로 인상시켰다. 국경일은 무조건 휴무하기로 하고 하계휴가도 신설, 3일을 보장받았다.
이런 교섭 결과가 "너무도 당연한 것들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에겐 작은 것일 수 있지만 이들 병특 노동자들에겐 '큰 승리'였다.
그러나 이들에겐 이런 '전리품'보다 더 큰 수확이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주변 동료들을 둘러보면서 "노조는 우리에게 또 다른 것을 주었다"며 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잠시 쉴 새도 없이 잔업 등으로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동료들 상호간에 인간적 유대는 거의 형성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출근하면 비슷한 또래임에도 눈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또 지방 출신들은 대부분 기숙사를 이용, 출·퇴근하는 동료들과는 어울릴 기회도 없었다.
"조합 활동을 하기 전까지는 서먹한 관계였어요. 또 출퇴근하는 동료들은 기숙사에 묵던 친구들이 밤 12시까지 잔업하는 것을 보고 '회사 충성파'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했죠. 그런데 조합활동을 함께 하면서 이런 오해들이 풀리지 시작했고, 모두가 비슷한 처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감'이었다.
병력특례자라는 '멍에' 때문에 자칫 회사쪽에 잘못 보이면 쫓겨난 뒤 곧바로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아나가는 과정에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획득한 것이다.
이는 이들 삼일코리아 병특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해 온 동부금속노조 류치건 조직부장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투쟁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많이 반성했습니다.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했는데, 병역특례자라는 어려운 조건을 이해한다는 핑계로, 코리아 조합원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선입견으로, 얼마간 수동적으로 움직였던 적이 있거든요."
어쨌든 삼일코리아의 병특 노동자들은 노조를 무기로 한 최초의 '승리'를 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완전한 것이 아님을 그들 또한 알고 있다.
"회사에서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진 않겠죠. 저희도 다음 싸움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삼일코리아의 병특 노동자들은 어제의 '노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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