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몸은 괜찮고요,직장은 알아보고 있는데 잘 안되네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지난 22일 오후 2시쯤 김모(24)씨는 취직을 못해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전화해 안심시켰다. 그로부터 2시간50여분 뒤 김씨는 기거하던 전 직장동료 문모(31)씨의 서울 석촌동 집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김씨는 지방 국립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의 한 IT업체에 취업해 일을 하다가 그만뒀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다른 업체에 취업하기 위해 상경,전 직장의 동료였던 문씨 집에서 취업준비를 해왔다.

인터넷 취업사이트를 통해 수십여 곳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주변사람들로부터 소개받은 회사의 면접도 여러차례 봤지만 애타게 기다리는 합격 전화는 오지 않았다. 이를 비관한 김씨는 지난달 6일 수면제를 과다복용,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그가 진료를 받은 K신경정신과의 진료기록에는 ‘직장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 증세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고향 인근의 병원에서 3월 말까지 치료를 받은 김씨는 지난 7일 서울에서 면접이 있다며 올라왔다가 낙방한 뒤 “고향에서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 어렵다”며 지난 10일 아예 짐을 싸 다시 상경했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김씨는 매일 인터넷을 통해 이력서를 제출했고 3∼4차례 면접을 봤지만 김씨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는 애타게 전화를 기다리다 결국 죽음을 택했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청년 실업률이 상승추세를 보이는 가운데 취업 문제 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24일 경찰에 따르면 IMF 한파가 밀어닥쳤던 1998년 1만2000명을 넘어섰던 자살자 수는 2년간 소폭 감소했다가 지난해 1만3000명을 넘었고 올 들어서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실제로 이날 오전 2시쯤 서울 성산대교 북단 둔치 앞에서 윤모(28)씨가 취업을 하지 못한 것을 비관,한강으로 뛰어들어 숨졌다. 윤씨는 결혼할 시기가 됐는데도 군 제대 후 6∼7년간 직업을 갖지 못해 괴로워하다 이날 성산대교 위에서 중앙선 침범 교통사고를 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1일에도 서울 서초동 우면산 산등성이에서 박모(37)씨가 관자놀이에 총을 쏴 숨졌다. 박씨는 국내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96년 이후 취업을 하지 못해 이를 비관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표창원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윤리,도덕 등 전통 가치의 의미가 점차 희미해지면서 규범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표 교수는 “특히 노동시장이 유연하지 못하고 사회복지의 수준이 높지 않은 우리의 현실에서 실업은 개인을 불안하게 만들고 실업자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인 시각은 실업자가 스스로를 낙오자나 패배자처럼 느끼게 한다”고 지적했다.

정승훈 권기석 엄기영기자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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