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성희 신부의 요즘 사는 얘기.
대학로는 흔히 ‘젊음의 거리’로 불린다. 이 거리 한복판에서 노인 재취업과 창업 운동을 펼치는 신부가 있다. 대한성공회 대학로교회의 지성희(池星熙·40) 신부는 65세 이상 노인과 퇴직자들에게 창업거리나 일자리를 소개하는 종로시니어클럽(Senior Club)을 맡아 2년째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01년7월 종로시니어클럽 관장을 맡은 뒤 지 신부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노인들이 운영하는 ‘친친 찜닭집’은 개업 당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이후 대구 떡집, 동해 한과, 충주 세차장과 유기농 농장 등 지 신부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노인 창업의 범위는 계속 늘어갔다. 노인택배사업, 노인 간병인 사업, 생화판매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발족 당시 5곳에 불과하던 지역 시니어클럽도 전국에 20곳으로 불어났고, 작년 10월 지 신부는 지역 시니어클럽의 전국 모임인 ‘한국지역사회시니어클럽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시니어클럽은 노인 창업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축적된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프로젝트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 서울·대구·충주·광주 등 4개 도시의 지역 시니어클럽이 벌이고 있는 숲 생태해설 사업이 한 예. 은퇴 교사 330여명이 지난해의 경우 거주지 인근 중·고교 학생들과 함께 토요일마다 가까운 동네 뒷산을 찾아 숲에 살고 있는 동·식물에 대해 해설해주며, 손자뻘뒤는 학생들에게 ‘자연’을 가르쳤다. 올해는 학생 3만3000여명에게 생태 교육을 할 계획이다.

목회자인 그가 노인 창업·재취업에 팔을 걷어붙인 이유는 뭘까. “1986년부터 노인 등을 상대로 무료 급식과 말벗해주기 등 자원 봉사활동을 펼치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나눔의 집’에서 일하면서 눈을 떴습니다. 그러던중 1997년 ‘IMF 사태’가 터진뒤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지요.”

지 신부는 노인들이 일자리를 갖고 스스로 경제적인 능력을 찾고 사회에서 역할을 하도록 하는게 자신에게 신이 정해준 ‘일’이라고 믿는다. “현재의 노인들은 70~80년대 한국을 먹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낸 주역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에게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올해 문화유산해설사업, 동물보호사업 등으로 노인들의 일자리 창출을 넓혀나갈 계획이다. 특히 서울에서만 매년 8000마리나 버려지는 강아지를 모아 돌보고 유료 분양하는 ‘강아지 쉼터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지 신부는 “앞으로 15년은 노인들과 함께 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 신부는 “지금부터 노인들의 취업·창업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20여년뒤 한국은 늙고 활력 없는 사회로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말 현재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전체 인구의 7.9%(377만명)로 유엔이 정한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에 진입했다. 오는 2019년에는 14.4%에 이르면서 고령사회(Aged Society)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더 큰 문제는 노령화의 속도. 프랑스가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 진입이 115년, 스웨덴이 85년이나 걸렸는데 비해 한국은 19년 밖에 걸리지 않을 전망이다.


2. 지성희 신부의 과거 얘기.

지성희 신부가 다닌 마지막 정규학교는 초등학교였다. 가난한 집안의 3남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그는 뚜렷한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와 행상으로 어렵게 가계를 꾸려온 어머니께 차마 ‘중학교에 보내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집 평수는 계속 줄어만 갔고 언젠가부터 전세였던 집은 사글세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지 신부는 노원구 상계동의 프레스 공장과 구로공단의 미싱 공장 등에서 일했다. 주유소·봉제공장도 다니고 계란장사도 해보았지만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있는 ‘마치고바(직원 10여명 미만의 소규모 공장)’이 제일 적성에 맞았다.

그 때 꿈은 어엿한 자격증을 가진 기술자가 되는 것이었다. 15세때부터 프레스와 선반을 만지고 재단사 일을 해왔기에 ‘자격증만 있으면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해인가 용기를 내 자격증 교육을 맡는 직업훈련원에 가보았다. 하지만 “중졸 이상만 교육을 신청할 수 있다”고 말하는 담당자는 그를 ‘초졸’(初卒)이 전부인 그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 신부는 이때 자신에게 대단히 화가 났고, 채찍이 됐다.

그때부터 그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낮에는 공장을 다니고 밤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주경야독(晝耕?讀)’이 시작됐다. 공장 일과는 저녁 7시까지였지만, 밤 9~10시까지 야근이 이어지기 일쑤였다. 일요일마다 그는 도서관을 찾았고 시험치기 한달전부터는 휴가를 내며 6개월만에 고입, 1년 뒤엔 대입 검정고시에 보란 듯 합격했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도서관에서 혼자 수학 문제를 풀다가 10시간만에 푸는 방법을 알아내고는 펑펑 울기도 했다.

배우고 싶어 밤에는 야학을 찾았다. 당시 대학교 신학생이던 야학 선생님들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라고 가르쳤다. “그전엔 ‘천국 가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 너무 싫었어요. 죽을 때까지 지금처럼 가난하게 살아야한다는 말로 들렸거든요. 하지만 야학 선생님들의 말은 오래 맘 속에 남았지요.”

군 제대후인 1986년 그는 다시 고향인 노원구 상계동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지만, 당시엔 판자촌이 즐비했던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그곳 빈민촌의 ‘나눔의 집’에서 지 신부는 그처럼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공장을 다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야학교사로 일했다. 12시간씩 옷 레벨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아이들은 동네 형과 같았던 지 신부를 부모처럼 따랐고, 그는 그때야 ‘예수처럼 산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 신부는 27세때인 1991년 뒤늦게 성공회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낮에는 대학생이었지만, 밤에는 여전히 야학교사로 일했다. ‘나눔의 집’은 야학뿐 아니라 무의탁 노인 돌봐주기, 소년·소녀 가장 돕기로 활동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다. 이 때문에 노인과 소년·소녀가장을 매주 2차례씩 찾아가 말벗을 해주고 후원금을 전달해주는 지역활동을 펼쳤다. 그에게 야학에서 세상을 가르쳐줬던 신학원생들은 어느덧 어엿한 신부님이 돼서 그를 이끌어줬고, 그도 2001년 신부가 됐다.

(김성현 기자 danp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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