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밥상머리에서 애들의 간절한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애비로서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다. 올해 중학교에 들어가는 큰 딸애와 두 살 터울인 작은 녀석이 지금 박씨를 향해 무언의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큰딸이 울상이면 작은 놈이 지그시 미간에 힘을 주었고, 작은 놈이 애원조로 눈꼬리를 내릴라치면 이번에는 큰딸애가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박씨는 결국 수저를 놓았다. 아내가 '밥을 왜 뜨다 마느냐'는 듯 뚱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저 아이들을 좀 보란 말이다. 박씨는 냉수로 입가심을 하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흥! 어디 계속해 봐, 니들이 아무리 그래봤자, 내가 눈이나 하나 깜짝할 줄 아니? 뽀삐, 그 똥개새끼는 오늘 부로 행복 끝이야.'

박씨는 상을 밀어내고 얼른 회사 작업복을 걸쳐 입었다. 아내가 안방에서 두툼한 점퍼를 들고 나왔다. 박씨는 현관으로 내려섰다. 문간은 노란 색의 앙증맞은 개집이 차지하고 있었다. 때마침 인기척이 궁금했던 강아지가 빼곡이 고개를 내밀다가 박씨임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며 몸을 숨겼다. 박씨는 '이 놈의 똥개를 한번 차버려?'하는 심술이 들었지만, 뒤통수에 꽂힌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해 그만두었다. 대신 아내의 손에서 점퍼를 받아들며 한 마디 내던진다.
"오늘 몇시라구?"
"2시요."
"만사 제쳐두더라도 저 똥개 저거, 꼭 병원에 델구 가도록 해. 오늘도 미적대다간 당신까지 혼줄을 낼 거야."
"아∼빠"
박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남매가 다가와 박씨의 팔을 각자 하나씩 잡으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박씨는 짐짓 언성을 높였다.
"어허!"
서슬에 놀란 아이들은 꿍얼꿍얼 말을 먹으며 박씨의 옷소매만 흔들어댔다. 어느 새 딸아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이들을 뿌리치고 박씨는 얼른 현관을 나섰다. 등뒤에서 작은 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빠 미워!"

평소 아빠라면 '껌뻑 죽는' 작은 아들놈이 시위에 나선 오늘의 비극적인 사태는 순전히 똥개 한 마리 때문이었다. 한달 전쯤 되었을까? 퇴근한 박씨가 현관을 들어서는 데 웬 털복숭이 강아지 한 마리가 애들 방에서 뛰쳐나오더니 죽어라 짖어대는 것이었다. 뒤따라 나온 두 아이가 박씨는 쳐다보지도 않고 "오셨어요?"만 건성으로 외친 뒤, 강아지를 안고 구르고 뛰고 난리를 부렸다. 입이 귀에 걸린 아이들은 거실을 바삐 오가며 "뽀삐!"를 연발하고 있었다.

'뭐, 뽀삐? 화장지 선전하다 온 똥개라도 되는 모양이지?'
황당해하는 박씨 앞에 나타난 아내는 미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남편이 천성적으로 개를 싫어하는 것을 잘 아는 그녀였다. 아내는 오랜만에 아이들 데리고 시장엘 갔다가 강아지 세일하는 곳에 이르렀는데, 아이들 성화도 성화거니와 그 가격이 너무도 저렴하여 큰 맘 먹고 한 마리 들였다고 설명을 했다. 박씨의 말려올라간 눈꼬리가 현관의 개집에 당도하기도 전에, 아내는 얼른 그것이 '무료 사은품'임을 덧붙였다. 더불어 아내는 저 개가 물론 순종은 아니지만, 마르티즈인가 뭔가 하는 고급스런 혈통의 어머니를 둔, 그래서 단순 똥개로 규정하는 데는 상당부분 무리가 있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박씨는 마지못해 뽀삐를 받아들였다. 한창 커나가는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다만, 박씨는 똥오줌이 발에 밟히지 않도록 할 것과 털이 날리는 것은 물론, 잦은 목욕으로 냄새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또한 너희들에게는 저 털복숭이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화장지 광고모델보다 이쁠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천하디 천한 똥개에 불과하므로 애비가 '뽀삐'라는 주제넘은 이름 대신 '똥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어떠한 이의도 달지 말라고 주문했다. 아이들은 흔쾌히 동의했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부터 박씨는 편안한 수면을 반납해야 했다. 뽀삐는 복도의 인기척이나, 실내의 자그마한 소음에도 미친 듯이 짖어댔다. 뿐만 아니었다. 어린놈이 밤잠까지 없어 밤새도록 개집이며, 현관문을 긁어대는가 하면, 아이들 방문 앞에서 낑낑대며 놀아달라 보채기 일쑤였다. 박씨로서는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며칠 전 참다 못한 박씨가 결단을 내렸다. 뽀삐의 성대수술을 요구한 것이다. 아이들은 까무러칠 듯 반발했으나, 박씨의 충혈된 두 눈앞에서는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식과 남편의 상반된 이해관계 속에서 고민하던 아내는 벌써 두 번이나 약속된 기일을 지키지 않았고 오늘 아침 마침내 박씨는 최후통첩을 날렸던 것이다.

그날 정오 무렵, 박씨는 회사 인근 한 식당에서 동향 선배인 이 반장과 마주앉아 김치전골이 끓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밑반찬이 겨우 나왔을 뿐인데, 이 반장은 소주를 권해왔다. 박씨가 손사래를 쳤다. 이 반장은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슬쩍 웃어보인 뒤 자작으로 한 잔을 가볍게 비웠다.
동향 선배라고는 해도 빠듯한 점심시간에 박씨를 밖으로 불러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더욱이 그는 박씨가 근무하는 전동기사업부 소속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말단 현장관리자는 부담스러운 내색 하나 없이 오히려 낮술을 권하고 있었다. 박씨는 내심 짚이는 게 있었다.
"이봐, 이제 그만 고집을 좀 꺾는 게 어때?"
"형님두 참, 고집은 무슨…."
"자네, 지금 하는 게 고집이 아니면 뭐야? 이봐, 의리도 좋고, 신념도 좋아. 그렇지만, 그딴 거 모두 자네 가족 두 다리 쭉 뻗고 잘 때 얘기야. 회사가 망하면 그 놈의 의리가 무슨 소용이냐구?"
"형님두 참, 멀쩡한 회사가 왜 망해요?"
이 반장은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짓더니 피식 웃으며 두 번째 잔을 들이켰다. 박씨는 냄비뚜껑만 하릴없이 여닫았다.
"아무튼 오늘을 결론을 짓자구."
"형님, 저는 탈퇴 안 할거유."
"어헛, 이 사람!…."
이 반장은 갑자기 위엄을 차린다. 우연이었을까? 박씨는 이 반장의 허세를 보면서 오늘 아침 현관에서 아이들의 손을 뿌리치며 위세를 부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박씨의 '어허!'하는 한 마디에 금새 눈물이 맺히던 딸아이 얼굴은 지금도 선명했다.
"형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탈퇴 안 해요. 내 명색이 대의원을 두 번이나 했던 놈인데, 지금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동생들 배반할 수는 없수."

박씨가 다니는 회사는 얼마 전 경영진을 전면 개편했다. 신임 사장은 '상시적 구조조정'과 '소사장제', '연봉성과급제'의 신봉자였다. 그가 또 하나 신봉하는 경영이념이 있었는데, 노조는 길들이거나 없애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노조와의 정면대결은 불가피했다.

회사측의 전술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본사와 그룹의 노무팀을 대폭 확대하는가 싶더니, 각 사업부별로도 별도의 관리체계를 구성했다. 반장들의 노조탈퇴가 한 달만에 이루어졌다. 반장들은 어느 새 열렬한 사용자가 되어 조합원들을 통제하고 나섰다. 블랙리스트가 있다더라, 몰래카메라, 도청까지 한다더라 하는 험악한 소문이 현장을 뒤덮었고, 공장은 금새 얼어붙었다.
노조의 파업은 목전에 와 있었다. 그러나 엊그제 있은 쟁의행위 찬반투표는 재적 조합원의 과반수를 겨우 넘는 사상 최악의 찬성율을 기록했다. 파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힘이 빠져 있었다. 이 반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봐, 자네 등급이 뭔지 아나?"
"등급요? 아니, 블랙리스트가 진짜 있기는 있는가 보네!"
"어허, 목소리를 낮추라니까! 내가 자네한테만 살짝 일러주는데 말이야. 자네는 지금 현재 '티(T)'로 분류되어 있다구."
"티? 그게 뭐유?"
"우리끼리는 그냥 '튀는 놈'이라고 그래, 말 그대로 노조쪽에 붙은 꼴통들을 말하는 거지."
"이런 망할 자식들을, 그냥…."
냄비가 두 사람 사이에서 맹렬히 끓고 있었다. 이 반장이 불을 줄였다.
"자네 기분은 이해하네만,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이번 파업이 법적으로 불법인 거 자네도 알지? 그 왜 머시냐, 조정대상이 안 된다고 그러더군. 이번 파업으로 아마 노조 대가리들은 다 모가지가 날아갈 거야. 근데 그걸루 끝이 아니란 말이야."
"……"
"자네같은 '티'등급 친구들은 상황에 따라 해고는 물론이구 손해배상까지 들어가게 된대. 그리 되면 사택에서도 쫓겨날테구, 완전히 쪽박 차는 거야. 해고는 면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회사한테 국물도 기대하기 힘들어질 거야. 엊그제 노무팀 김 과장한테 들은 얘긴데, '튀는 놈'들은 잔업, 특근 같은 거 절대 안 시키고. 포상은커녕 진급심사에서도 배제시킬 거라고 하더군."
"저, 저런 죽일 놈들"
"이봐, 잘 들으라구. 자네가 그렇게 계속 고집을 부리면 영원히 반장 못 달아, 자네 체면은 뭐가 되고 또 사택에 같이 사는 가족들 위신이 어떻게 되겠냐구!"
이 반장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박씨는 한 순간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것 같았다. 이 반장이 술병을 들었다. 박씨의 잔에 소주가 채워졌다. 이번에는 박씨도 잔을 들이켰다. 이 반장의 속삭임은 계속됐다.
"탈퇴해 버려, 까짓 거. 어차피 자네보다 더 열성적이던 놈들도 다 탈퇴해 버렸어. 자네 하나 더 이름 넣는다구 달라질 건 없어. 그리고 김 과장이 전해주라고 했는데, 자네가 성의만 보이면 올해 안에 반장 달 수 있다는 거야."

박씨는 한 잔을 더 들이켰다. 속에서 부아와 더불어 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이것들이 지금 그 잘난 반장자리를 들이밀며 나더러 변절을 하라 하는구나. 선배는 선배대로 대세가 기울었으니, 얼른 편승하여 자기 잇속이나 챙기라는 주문이고…. 결국 던져주는 먹이나 냉큼 뛰어올라 집어먹는 개가 되라 하는구나!
박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반장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으나 박씨는 냅다 뿌리쳤다. 식당을 박차고 나오면서 박씨가 소리쳤다.
"내 반장 안 하면 안했지, 그 짓은 못하겠수. 당신, 선배만 아니었으면 오늘 험한 꼴 당할 뻔했어, 운 좋은 줄 알라구!"

잠시 후 박씨는 회사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팔팔 끓는 김치전골을 눈앞에서 마다한 배고픔에다 분노가 겹치면서 박씨는 꽤 지쳐 있었다. 식당에서 이 곳까지 적지 않은 거리를 걸어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감이나 불안감 같은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상반된 감정들이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공장에 가까워질수록 이 반장을 다시 한번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내였다.
"여보, 지금 나가려구요."
"어딜?"
"뽀삐, 성대수술 말예요."
박씨는 그때서야 오늘 이 반장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 하나가 더 있었음을 상기했다. 이제 한 시간 남짓 후면 그 잡종개는 수술대 위에 오를 것이다. 볼품 없는 몸뚱이에 마취주사가 꽂히면 짧은 다리들이 찰나간 버둥이다가 모든 저항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어 목덜미 부근의 잔털이 깎여나가고 그 녀석의 콩알만한 성대조각이 분리되어져 나올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녁부터 안락한 잠자리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 성대를 잃은 애완견들의 바람 빠지는 소리 정도는 처음에 끔찍해서 그렇지 익숙해지면 괜찮다고 들었다. 그래 이제 한 시간 남았구나!
"그만 둬."
"네?"
"그만 두라구."
"……"
전화 저쪽에서는 분명 아내가 반색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박씨는 재차 말을 이었다.
"그만 두라구. 개가 모름지기 짖어야 맛이지. 짖지도 못하는 똥개새끼를 어따 쓰겠어?"
박씨는 성급히 휴대전화를 닫았다. 저편의 침묵이 꼭 자기의 점심시간을 속속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걸음을 서둘렀다. 어느 새 허기마저 잊은 박씨의 뇌리 속에는 뽀삐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복안들이 앞다퉈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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