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엔 "사안 따라 신중 대응"…언론들, 대선 끝나자 민주노동당 또 외면

외연 확대 "당 정상화 뒤 각 단체와 정례협의 강화"…정당명부제가 정치개혁 핵심

2002년은 민주노동당에게는 약진의 해였다. 지방선거에서 8.1%의 지지로 일약 '제3당'의 반열에 오르더니 연말 대선에선 근 100만표를 득표함으로써 '또 다른 승자'라고 평가받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앞에는 새로운 높이의 실험대가 기다리고 있다. 명실상부한 진보정당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것은 물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본 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는지를 판가름할 2004년 총선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03년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고 하겠다.

지난 대선 기간 민주노동당 바람을 주도해 온 권영길 대표를 만나 대선 평가와 2003년 민주노동당의 활동 전망 등을 들어봤다.

- 많은 사람들이 지난해를 민주노동당의 약진의 해로 평가했다. 대선을 경과하면서 국민적 인지도와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97년에 이어 두 번째 출마다. 대선 결과를 보면서 소회가 남달랐을 텐데.

"대선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표방지 심리를 막아낼 뚜렷한 방도가 없었다는 점이다. 국정을 맡을 집권세력으로 민주노동당을 보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한계였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이 집권세력으로 인식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 권영길에 대해 아무리 '똑똑하다', '정책적 면에서 제일 나았다'고 평가하면 무엇하겠는가. 제일 나으면 찍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한다. 그래서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힘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04년 총선이 갖는 중요성이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이 있었다면 국민적 관심과 정책적 지지는 돌풍을 일으키고 3강 구도까지 가능했을 것이다."

- 대선이 끝난 뒤 국민들의 관심은 이제 노무현 당선자의 행보에 집중돼 있다. 향후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 계획인지.

"노무현 정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반DJ' 정서의 최대 수혜자가 노무현 당선자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DJ 정치에 동의하지 않고 개혁을 원하는 세력이 노무현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민주노동당에게도 시사하는 바 크다. 더욱이 민주노동당과 노무현 당선자의 지지기반이 중복되는 부분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정권 시절 정권에 대한 공격으로 민주노동당의 목소리를 키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권에서도 이것이 통하겠는가. 무조건 지지나 반대보다는 사안에 대한 종합적 평가가 필요하다. 특히 민주노동당 지지기반 확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며 매우 섬세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민주노동당이 국회 의석이 없는 조건에서 선거가 없는 올 한
해 동안 다시 언론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는 등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이는 부유세 등 대선에서 국민적 호응을 받았던 정책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을 의미기도 하다.

"민주노동당이 대선에서 스타가 됐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현재 보수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만을 중점 보도하는 조건에서 민주노동당의 대선 성과는 2개월 이상을 지속하기 어렵다. 잊혀지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대선 과정에서도 TV합동토론을 통해 부각됐지만 일상적 보도에서는 제외됐으며 대선이 끝난 지금 언론은 여전히 민주노동당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제도언론 뿐 아니라 인터넷 언론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민 접촉에 극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 활동이 비효율적이고 원시적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대다수 국민들이 지지했던 '부유세 도입'에 대한 서명작업도 준비 없이 시행했다가는 오히려 상징적 의미를 반감시킬 수 있다. 시기와 방법 등에서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

- 당의 외연을 넓히는 문제도 중요성을 더한다는 지적이다. 선거이후 국민접촉면이 현저히 줄어드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직 기반을 확대하는 작업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대선에서 공동선거대책본부를 구성했던 전국연합, 민주노총, 전빈련 등 민중단체들과 공조체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 민주노총과 진행하고 있는 정례협의로 정책중심으로 더 발전시켜 나갈 것이고 다른 조직들과도 정례 협의를 확대해 나갈 것이다. 특히 공선본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전농과도 공동사업을 위해 통로를 개설하고 정례화하겠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농민 정치세력화'도 포함된다고 본다. 하지만 농민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농민들과 논의의 장을 마련해 대안을 찾을 것이다. 이와 함께 농민문제를 일상적 사업으로 가져가야 한다.

당 개편작업은 분명히 해나가야 하지만 좀 폭넓게, 그러면서도 치밀하고 섬세한 논의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난 7월 무산된 '범추'의 재판이 될 수 있다. 당위성에만 매여 서로간에 충분한 논의와 합의 없이 진행될 때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특히 권 대표는 외연확대 작업에 앞서 당 조직에 대한 개편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 대표는 2월말 예정된 전당대회 준비와 이후 사업의 연속성을 위해 2월 중순 이전에 상집체계를 개편한다는 구상이다. 그는 "우선 대선 체계를 일상적 체계로 전환하고 순항하는 시기가 됐을 때 외부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게 원칙"이라고 말해 당 내부 체계 정비에 주력할 뜻을 비쳤다.

- 대선 득표결과를 분석하면 전반적으로 지지층이 넓어졌지만 당초 기대를 모았던 수도권지역 사무직노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데 실패했다는 분석도 있다.

"민주노동당은 지금까지 고학력, 사무직, 수도권에서 주로 지지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선 지지기반이 확대됐다. 여성 지지율이 올라갔고 저학력 지지가 굉장히 높아졌다. 연령별로는 50대 지지층이 늘어났다. 문제는 이런 추이를 유지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확충하느냐이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 사무직들은 '반 이회창' 분위기에 휩쓸려 갔다. 민주노동당은 처음부터 '반 이회창' 논리를 넘어설 구호를 개발하지 못했다. 2004년 총선에서도 정책이 중요하겠지만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논리 개발이 중요하다고 본다."


- 선거를 앞두고 비정규직 차별철폐 100만명 서명운동을 벌였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한 것 같다. 비정규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섰음에도 민주노동당의 지지층은 조직노동자가 중심이라는 비판도 있다.

"비정규직들이 민주노동당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처지가 너무 어렵다보니 현실적 힘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정치적 힘을 갖지 않는 한 풀리지 않는다.
또 비정규직 문제는 현장에서의 인간적 소외이다. 이것을 푸는 게 급선무다. 조직노동자들이 심정적으로는 비정규직에게 우호적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노동계가 비정규직 조직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고서는 비정규직 문제는 풀기 어렵다."

- 민주노동당이 2004년 원내 진출을 위해선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중심으로 선거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무현 당선자는 중대선거구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노 당선자가 중대선거구제로 정치개혁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핵심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개혁의 핵심은 정당 민주화다. 당원의 당비로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될 수 있는 정책정당이 핵심이다. 그런 정당만이 선거에서도 정책선거와 돈 안 쓰는 선거를 할 수 있다. 정당명부제가 실시되면 이런 정치개혁이 가능하다. 노 당선자가 이를 계속 거부한다면 정치개혁보다는 기존 정치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단호히 대응해 나갈 것이다."

김재홍 기자(jaehong@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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